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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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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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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부부가 죄를 지은 때문에 하나님께 징벌을 선고받은 그 무서운 때는 아침인가 낮인가 아니면 저녁 무렵인가?’

느닷없이 웬 실없는 질문이냐고? 그렇다. 어쩌면 이는 지극히 사소하고 지엽적인 것을 묻는 부질없는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소한 것이 절대로 사소한 것이 될 수 없는 곳에 바로 성경의 무서운 신비함이 있다.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두 사람은 너무 순진했다. 철부지라 할 만큼 순진했다. 그래서 남편은 두려움에 아내를 핑계 삼았고, 아내는 무서워 뱀에게 떠넘겼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더욱 가슴을 저몄을 것이다. 차라리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했으면 그나마 가슴이 덜 아프련만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통곡하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다! 그날 그 저녁의 의미는 하나님께는 절대로 사소한 것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저녁을 생각하시고서 성경 한 구절을 적으셨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창세기 38----

이제껏 우리 누구의 관심도 그다지 끌지 못했던 아주 평범한 성경 구절이다. 하지만 거짓말하는 마귀의 혀를 얼릴 만큼 써늘한 <사실>에 관한 기록이다. 어떻게든 인류 역사의 진실을 가려 버리고 싶은 마귀의 속셈을 백일하에 드러내시려 하나님께서 마지막 세대를 위해 봉인해 두신 말씀이다.

먼저 재미있는 한자 이야기부터 간단히 하자. 19세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 한자문화를 접하게 되면서부터 아주 놀라운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자의 상당수 글자들이 창세기의 사실들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글자가 바로 큰 배를 뜻하는 선()이라는 글자다. 풀이해 보면 이 글자는 배를 뜻하는 주()+여덟 팔()+입 구() 이 세 글자의 조합이다. 입 구()는 사람의 입 그 자체 이외의 용법으로 쓰일 때에는 주로 사람의 수를 뜻하는 의미로 쓰인다. ‘인구(人口)조사’ ‘식구(食口)가 많다등이 그렇다. 그러므로 아주 큰 배를 뜻할 때 사용되는 이 선()자를 풀이하면 8명의 사람이 탄 배가 된다. 하지만 8명 정도 타는 배를 큰 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 고대에 큰 배라면 노아의 방주보다 큰 배는 없었고 그 방주에 노아 부부와 세 아들 부부 이렇게 8명이 탔다. 아무래도 이 선()자를 노아의 방주와 관련 지어 설명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을 듯하다.

 

금할 금()자는 신()을 뜻하는 와 두 나무 자의 조합이다. 자는 원래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금()자는 신이 생명과와 선악과 두 나무(林)로 상징되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엄히 명령하는 뜻이 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C.H.KangE.R.Nelson 공저, 이강국 편역한 <창세기의 발견>(미션하우스)이란 책은 이 외에도 상당히 많은 한자가 성경 말씀과 분명히 상관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녁() !

필자는 이 책을 읽은 후 이따금 한자를 대할 때면 위와 같은 관점에서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는데 위 책에 없는 몇 글자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이름 명()자가 있다. 풀어 보면 저녁 석()에 입 구()의 조합이다. <저녁><>을 어떤 뜻으로 조합해서 <이름>을 뜻하고자 한 것일까? 조금 어렵다. 역시 성경밖에는 없다. 성경에 사람의 첫 이름이 누구인가? 아담이다. 아담이 죄를 범하고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그러면 그 시각은 어느 때였을까? 한 번 더 성경을 보자!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 중략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 창세기 38~9---

 

여기서 날이 서늘할 때라면 일단 어두운 밤을 제외하면 하루 중 아침과 저녁이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낮일 터이고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 오셨다. 그렇다면 성경의 <날이 서늘할 때>는 결국 저녁이 된다. 즉 날이 저물 무렵()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다. 아마 슬픔에 찬 하나님의 음성이 아담의 귀에는 천둥처럼 울리며 그의 가슴을 덜커덩 내려앉게 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이름 명()자이다.

 

그런데 이 이름 명()자를 잘 보면 몇 가지 놀라운 사실들을 더 발견할 수 있다. 이 한자를 만든 이는 지금 아담이 하나님께 징벌을 선고받는 그 무서운 시각을 마치 현장에서 보고 있었던 듯이 잘 알고 있다. 한자는 배달족의 창힐이란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그 지엽적인 사실을 그다지 잘 알고 있었을까?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짚어 볼 게 있다. 글자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많은 추측을 하는 것은 혹시 논리의 비약이 아닐까? 한문 서당 선생들은 이 글자를 전혀 달리 풀이한다. 아무래도 이 글자 하나로만 위처럼 에덴동산을 거론하는 것은 무리겠다.

 

그럼 뭐 다른 방도가 없을까? 너무 아쉬워 필자는 옥편을 뒤적이다 또 다른 저녁 석()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바로 죽을 사()자다. 어디 한 번 풀어 보자. 하나()+저녁()+비수()의 조합이다. 여기서 하나()는 숫자로서의 의미 외에 하늘의 형상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하늘이란 말은 을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우리 배달족 사람들은 이 세 가지의 뜻을 아울러서 하나()를 유일신인 하나님을 의미하는 글자로 사용하였다.

 

태곳적의 배달족을 그 배경으로 한다는 천부경(天符經)은 한자 81글자로 된 문서이다. 그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된다. ‘일시무시일 석삼극 무진본(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이를 직역하면 이렇게 된다. ‘하나는 시작이지만 시작됨이 없는 하나이니, 삼극으로 나뉘어도 근본은 변함이 없다.’ 무슨 말일까?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럿 있지만 누구도 아직 그 뜻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하나님>으로 새겨서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 보면 어떨까? ‘하나님은 모든 것의 처음이지만 그 시작이 따로 없으신 하나님이니, 삼위로 나뉘어도 그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문서의 맨 마지막 구절이다.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하나는 끝이지만 끝남이 없는 하나이다.’ 이 또한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마지막이시나 그 끝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어디서 많이 들은 말 아닌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금방 요한계시록 2213절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천부경이란 게 워낙 의문점이 많은 문서이니 더 길게 얘기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듯하다. 아무튼 여기서는 <>이라는 글자의 의미만을 새기면 되겠다. 그래서 결국 사()자는 하나님께서 저녁 때 날카로운 비수로 찌르셨다는 의미의 글자가 된다. 에덴에서의 그날 저녁, 영적으로는 아담과 하와가 죽었고 육적으로는 사람의 벌거벗음을 가려 주기 위해 짐승이 죽었다. 우주 최초의 죽음이다.

 

그러고 보니 저녁 석()자가 하나 더 있다. 원망할 원()자다. 풀어 보면 저녁()+()+마음()이 된다. 그날 저녁 에덴에서 하와를 유혹하였던 뱀을 생각하면 한없이 원망스럽다는 뜻이다. 여기서 원()자를 정확히 쓰려면 뱀을 뜻하는 자가 아니라 이 맞지만, 필자의 생각에 전승과정에 뭔가 혼동이 있었던 듯하다. 어떻든 을 뱀으로 풀이하더라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이 정도면 되었다. 성경에도 두세 사람의 증인으로 사실 여부를 확정하라 기록되었다. <이름><죽음> <원망>을 나타내는 동방의 글자들에 들어 있는 <저녁>의 의미가 창세기의 그 두려운 저녁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기원전 2300여 년 무렵, 초기의 한자를 만들어 사용하던 동방의 사람들은 에덴동산의 그 가슴 아픈 사연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세 글자에서 저녁의 의미가 일치했으니 그 근거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저녁 석()이란 글자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실낙원 기사에서 저녁이란 시각은 그다지 중요한 의미가 없다. 지극히 지엽적인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창조 이후 창힐의 시대까지 1800여 년이란 세월 동안 글자도 없는 상황에서(글자가 있었더라면 굳이 한자를 고안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토록 세부적인 사항까지 전달되어 왔다. 그리고 그 사소한 내용이 그때로부터 무려 7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지구의 반대편에서 모세에 의해 기록된 창세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과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창힐이 외웠던 창조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손에 있는 성경의 <창세기 기록과 똑같은 내용으로>, 그리고 그것도 정형화되어 있는 <문장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정형화된 문장의 형식이 아니고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 형식이었다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날이 서늘할 때>라는 시간은 절대로 1800년 동안이나 구전될 수 없다. 쉽게 설명하자. 한민족 탄생신화로 전해지는 단군신화에서 곰이 웅녀로 변한 시각이 아침인가 저녁인가? 이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사실이 있다면 그건 성경은 극사실주의적인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마지막 세대를 위해 봉인된 말씀들 2011 좋은땅출판>에서 발췌하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