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삼일TALK

추천 수 0 댓글 1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글은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느낀 부분에 대해서 사적인 의견을 적어보는 것이므로 많은 분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35세 이전까지는 세상에서 속 편하게 할 짓 다 하면서 살다가,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만나(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고 지금은 믿습니다만) 질질 끌리다 시피 하나님께 나온 사람입니다.  살려달라고 싹싹 빌며 지낸 세월이 이제 어언 10여년이 되어 가네요ㅎㅎㅎㅎㅎㅎ

그렇게 세상에서 속 편하게 살다가 교회를 나오게 되어서 그런지,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면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읽은 말씀들을 기반으로 엮어서 글로 써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래의 주제입니다.

신학적인 검토를 깊이 거치거나 권위가 있는 글도 아니므로 너무 무겁게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르지 못한부분은 지적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별 내용도 없는것이 너무 깁니다. 관심없는 주제이다 싶으시면 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비판에 관해서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처음에 교회에서 몇가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하나가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여지껏 세상에서는 건전한 비판이 없이는 나쁜것들이 개선되지 않으므로 비판은 꼭 필요하다고 배웠고, 비판의식을 가지라고 독려하는 가르침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마태복음7장의 말씀, 로마서14:1의 말씀에 대해 의문을 가진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비리나 추문에 연루된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비판듣기 싫을때 종종 사용하는 경우를 보고 화가 치밀 때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말씀에 비춰진 나를 만날수록 그 어떤 비판받을 사람보다도 내가 낫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마7:3의 말씀처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들보가 내 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의 피로 용서받은 내 입장, 그리고 내 죄된 근본과 습관을 알고나니, 도저히 남을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의 나의 교회생활은 아무리 잘못되고 불합리해 보이는 일에 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 기도만하고 그냥 입 다물고 참았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자세도 이런것 같았다.

 

 

그러다가 보니 간단하게 말 한마디만 하면 오해없이 개선되고 좋아질 수 있는 일인데도 말한마디를 못해서 별 것 아닌 문제가 나중에 가서 더 일이 커지고 곪아터져서 관계가 심각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교회내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다. 의도적인 악의를 가진 사람들,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아병적인 기질을 가진 부주의한 사람들이 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릴때도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세상의 모임이나 어린 아이들 모임에서도 보기 힘든 혼란스러운 무질서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종종 보았다.

하나님께 맡기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 무질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본적이 없었다. 결국 곪아터져서 사고가 나고 그때서야 허둥지둥 수습하는 것이 내가 본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아무리 비판 안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주로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를 말하고, 또 매체에서 접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우리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어느 정도 기간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새롭게 안 것들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비판이라는 말을 악의를 가졌건 사랑의 마음으로 충고를 하건 크게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하는데,

성경에서는 당사자에게 듣기 싫은 쓴 소리로 들릴 것은 똑같지만 그 말하는 사람의 자세와 목적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취급되는 용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권고, 권면, 책망, 경고, 이런 단어들이었다.

듣는 사람이 듣기 싫은 소리 한다고 다 비판이 아니었다. 성경은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구성원에게 기도할 책임을 부여하고, 그 질서를 파괴하는 자에게 권고할 의무와 분리를 위해 노력할 의무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마7장의 말씀은 비판하는 자의 자격과 자세에 관한 것이지 인간이 절대적으로 싫은 소리를 듣지 말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에는 남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모두가 비판이라고 하는 분위기가 깔려 있는 것 같다.(물론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를 볼때 거의가 비판이 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안하면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줄 줄 알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악의적인 쓴소리인 비판과, 성경에서 용인된 쓴소리인 권고, 권면, 책망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1.비판과 권고(책망)의 개략적인 차이.

비판과 권고(책망)는 듣는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점, 그리고 듣는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래서 그 차이를 분별해 보자면 그것을 하는 사람의 동기나 마음의 상태로 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비판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와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 관해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을 말 한다.

미움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목적을 가지고, 또는 그 목적이 없더라도 부주의로 인해 상처를 줄 수 있는 교만한 상태와 자세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비판과 권고의 차이는 말하는 사람의 지식도 아니고 외형적인 권위의 유무도 아닌 비판하는자의 마음의 자세에서 갈라진다. 그 동기와 마음의 자세는 본인과 하나님은 분명히 안다.

모든 듣기 싫은 말을 다 비판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성경에서 권고와 책망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과 또 분별하고 책망하라고 하신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 듣기싫은 소리에 대해서 그것을 하는자는 어떻게 해야 하고, 그것을 듣는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2.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사람의 자세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할 때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외식이 많고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마7장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롬14:1과 함께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용이다. 그 말씀은 비판하는 자를 대상으로 자격이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이지 비판 받는자가 수비에 활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책망받는 자의 자세에 대해 잠언서와(잠12:15, 잠13:18,잠15:32,잠29:1 등등 20여구절이 넘는다) 서신서에 풍부하게 기록해 놓았다. 겸손하게 듣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두 다 비판해서는 안될 자이며 또 모두다 책망받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잠9:8은 거만한자를 책망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고 말한다. 지혜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고 말한다. 이는 지혜있는 자는 책망을 들을 줄 알고 교훈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또 책망을 들을 줄 모르는 자는 거만한자라는 말이 된다.

책망을 듣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보면 그 책망이 정말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인지 아니면 무시해도 되는 말인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것이다.

 

 

쓸데없는 악의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상대하기 보다는 무시하고 피하는 것이 낫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 그 비판하는 사람 본인 자체가 교만하기 때문에 내가 역으로 하는 말을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잠9:7에는 오히려 능욕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때가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이하에서 말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주관하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친후에 나오는 권고나 책망은 분명히 듣는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지혜자의 자질은 듣는마음에 있다.

 

 

듣기 싫은 소리라도 일단 들어보고 시간을 가지고 생각한 다음에 무시할것, 수용할것, 골라낼것을 생각해야지. 듣고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혜자의 수준이 아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마7장의 말씀을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인용했거나, 인용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내가 이미 교만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잠언은 받아들이거나 상대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내 반응이 좀 다르기 때문이다.

 

 

 

 

3.듣기싫은 소리를 하는사람의 자세.

위의 1.개략적인 차이에서 말했듯이 비판과 권고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것을 하는 사람의 동기와 마음의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하고자 하는 동기와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상대방(사람이든 공동체든)의 변화를 위한 진심과 그를 위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말이 꼭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부주의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성은 있는지, 등 점검할 필요가 있는 사항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1).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바탕을 두었는가?

비판은 내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권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고를 하려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

권고는 우리 모두 틀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뜻이 이러할 것입니다” 라고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세를 낮출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단(롬2:1, 롬3:9-18)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듣는 사람에게 수긍을 받아낼 수 없을 것이며. “너나 똑바로 해라”라는 대답에 대응할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2).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나 비판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가? 그 비판이 맞다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 행복하던가.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비판은 아무리 그 말이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행복하게도 하지 못하고 덕이 되지도 않으며 은혜를 끼치지도 못한다.

 

솔직히 맞는 말일수록 더 기분 나쁘고 더 화가 치미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것 같다. 틀린 소리라면 그냥 무시라도 할텐데, 옳은 소리니까 아픈거다. “너는 좀 낫냐?”라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3).그 사람의 변화를 위한 진실한 마음. 사랑의 마음.

비판하는 사람은  스스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대체로 자기의 감정을 풀기위해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고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고의 말을 전할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만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이 실려서는 안된다.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 미운마음, 등이 섞여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그 싫은 소리를 하면 내용보다 이 감정이 먼저 전달된다.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더라도 이 감정이 실리면 그 말은 그냥 비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의 변화를 위한 마음보다 나의 화풀이가 우선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죄에 물들어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피를 덮고 오래간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성에서 비롯되는 미운감정, 무시하는 감정을 뽑아내고 권고해야 듣는자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다.

 

 

4).권고에 앞서 깊고 집중적인 기도를 해야한다.

참된 권고자는 스스로도 근본적으로 의롭지 못하다는 기본을 깔고 아주 조심스럽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참을 고민한 후 진정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에 권고를 한다.

그래서 한마디 권고를 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 길게는 몇년을 기도하기도 한다. 잘못된 말한마디가 얼마나 듣는 사람의 인생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보면 권고하고 지적하고자 했던 생각들 중에 10중에 9는,

나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생긴것, 또는 내가 나서서 말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닌것,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해결될 것, 그리고 많은 부분은 그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일. 등등 이다. 꼭 해야 하는 말은 10분의 1(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작은 비율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어림해본 수치입니다.)정도이다.

 

 

이과정에서 오래 기도해본 사람은 듣는 그가 마음 아플것을 알면서 그 말을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게된다 “하나님 이 말을 제가 안하면 안되겠습니까. 안하고 해결날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그 책망의 절차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한 절차인지를 알기 때문에 솔직히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또 어떤 지적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고집과 기도부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행위가 된다면, 일반적인 다른 잘못의 경우보다 하나님의 질책의 강도가 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 기자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줄 알라고 말씀하셨다(약3:1)

 

하나님은 다른것은 몰라도 ‘자기의로움’에 빠져 있는 자기자식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한 조치를 취하시는 경향이 있으시다.

 

하나님께 맞아본 사람은 안다. 조심 또 조심해야 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을 위해 책망을 할 수 있다.

 

 

5).반드시 권고를(책망)해야 하는 때도 있다.

위에서 말한 10분의 1 중에서 어떤 경우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밀어붙이시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진리에 관련된 중요한 일들일 경우, 그리고 영혼구원에 관련된 긴박한 일인 경우,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교란이나 심한 부주의에서 나오는 질서교란 등이 그런것 같다.

 

진리에 관련된 영적인 공격. 우리의 믿음의 기반에 흠집을 내거나 영성을 무디게 하고자 하는 혼합주의의 공격 등에는 혹여 실수가 있어 다음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근간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순위가 앞서기 때문이다.

마귀는 교묘하게 혼합하고 섞어서 우리가 다음에 바로 잡지 못하도록 미혹하는 방법을 잘 쓰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고백에 관한 문제가 그렇다. 당시에 선명하고 정확하게 하지 못하면 추후에 얼버무려 져서 희미해지고 혼합되어 지는 습성이 우리에게 있다.

마귀가 주로 하는 짓이 안면을 밟고 와서 거부하지 못하게 타협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곳에는 꼭 상대방의 선의를 악용해서 나쁜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도들이 선하고 순진한 것을 알고 일부러 교회에서만 전문적으로 사기를 쳐먹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또 공동체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은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교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설쳐서 질서를 교란하는데 그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을 여러 번 본적이 있다.

그렇게 고의적으로 남의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에 적절한 책망이나 징계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핑계로 손을 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기도로 깨어서 분별하지 못한 영적인 게으름에서 나온 나태한 행위일수 있다.

 

 

차라리 전혀 쓴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속편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면서도, 분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또 있는 것이다.

불의함을 보고도 전혀 권고와 책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혹시 내가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예레미야는 책망(권고)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시켜서 속에서 불이 나는 것을 느끼면서 책망을 했다고 한다.

책망은 내가 쓴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기 싫은데 하나님이 속에서 하라고 밀어 부칠때 아픔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6).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우리에게 없다.

사랑과 기도가 담긴 권고는 듣는 사람도 영의 감각으로 알아듣게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그 원수가 귀해서가 아니라 내가 귀해서이다. 그 원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처방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제일 미운 사람을 위해서 가장 먼저, 가장 긴시간 기도하라”.

참 현명한 방법인것 같다. 제일 미운 그 사람을 미워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막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에 그걸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미움이 제거되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나서 권고를 하게 되면 듣는 사람도 그걸 느끼게 되어 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만든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우리에게 없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인간은 그것을 나쁘게 사용할 수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충분히 나쁘게 사용할 수 있는게 인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관점은 ‘어떤 한 사건에 관해서 표면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문제나, 몇 가지 옳아 보이는 행위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봤을때 그 이웃 또는 그 공동체와의 통전적인 사랑의 관계에 관해 선한 의지가 있는가’ 이다..

가끔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또 부주의해서 넘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째로 전체적으로 조망해 봤을때 그가 타인과 공동체를 사랑하는가? 또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선하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가 있는가?

이것이 인내가 많으시고 눈과 마음이 넓으신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그 전체적인 선한의지나 방향까지 틀어질 수 있다는 급박성이 있을때 조심성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 권고이다.

한 두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고 함부로 내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나도 분명히 한 두가지 그 사람눈에 거슬리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7).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외적인 절차.(마18:15-17)

성경에 기록한 이 절차도 그 책망을 들어야 하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덜 받게 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가).1대1로 대면해서 만나서 해야 한다.

다른사람에게 험담을 해서도 안되고 그 사람과 1대1로만 해야 한다. 제3자가 모르도록 해야 한다.

나).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사람이 가고

다).그래도 안되면 교회에다가 말해서 처리한다.

그러나 이것도 그를 미워해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보호 차원과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라는 압력으로 죄지은 자에게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4.결어

원칙적으로 권고나 책망은 목회자나 장로뿐 아니라 일반성도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쓴소리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를 원하신다. 세상과 불의를 향해 책망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 일인지를 안다면 아무나 함부로 나서서 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간 상대를(개인이든 단체이든)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권고(책망) 했다면 설사 그 자세가 단호하고 냉정한 외양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한 권고(책망)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대방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판이 아닌 선한 책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여러 번 내 생각을 부인해보고 오래간 기도한 다음에 권면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권면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한 적이 많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 ?
    권대원 2014.05.17 07:27
    비판에 대한 깊은 통찰이자 좋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한가지 생각해 봐야할 것은 제시하신 원리가 보편적이려면 '비판에 대한 비판'에도 적용가능해야 할 것 같네요. 백형진 님이 비판하고 싶은 글(아마 제글인 것 같은데^^)에 대해 비판하시고 싶어 이글을 올리신 거라면 올리시기 전에 저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깊고 집중적인 기도를 하신 후 이 글을 올리신거겠죠?^^~ 그 깊은 사랑과 뜨거운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완전할 수 없는 지성과 분별력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라면 이해는 가지만 인간이 그렇게 사라분별을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리면 무엇이 공동체에 해가되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성의 분별력은 다른 지체의 견제와 내주하시는 성령의 감시와 견제로 계속 긴장관계를 유지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인간이 옭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그렇게 단정지어 버리시면 정당한 비판이든, 비판에 대한 비판이든, 비판을 위한 비판이든 그 중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이라 판단할 수 있나요? 설마, 목사님들의 판단은 다 옳고 완전하며 성도들의 판단은 다 미개하고 불완전하다고 믿으시는 건 아니시죠? 목사나 성도나 직분의 차이만 있을 뿐 신분의 차이도 아니고, 둘다 죄인이고 둘다 불완전하고, 둘다 견제와 감시와 필요하며, 둘다 불쌍히 여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이성의 사리분별력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 견제받아야 할 점은 있을지언정 옳고 그름을 절대로 인간이 판단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은 그말을 하는 사람의 말조차 신뢰할 수 없는 반지성주의적 사고입니다.


    마지막으로 비판의 절차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데 백형진님의 글에서 이야기한 비판의 절차는 개인의 죄나 허물과 관련된 문제를 향한 권면과 비판에는 적절하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의 문제나 교회 내에 책임있는 직분을 갖고있는 사람의 행동에 대해선 공개적인 논의와 비판, 책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떠난 사실땜에 많은 사람과 바나바까지 마치 이방인들과 교제하지 않은 냥 위선에 빠진 것을 비판할 때 '모든 사람 앞에서'(14절) '공개적'으로 책망합니다.


    '그런데 게바 가 안디옥 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것은 게바 가, 야고보 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 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 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갈라디아서 2:11-14 새번역)


    공교회의 건강함을 무너뜨리는 지도자의 위선의 문제를 다룰 때 바울은 개인적 권면을 거치지 않고 바로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큰데다, 빠른시간안에 옳고 그름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많은 성도들이 그 악영향(위선)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죠.

    마찬가지 원리로 공교회의 문제는 (그것이 꼭 범죄의 문제가 아닐지라도) 교회 공동체적으로 오픈해서 논의하고 적극적으로 상의할 수 있다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 뿐 아니라 성경도처에 그 원리를 찾아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대표적이죠. 교회안에서 이방인이 할례를 꼭 받아야 한다고 유대인들이 주장하자 바울과 바나바와 정면으로 논쟁이 붙습니다.


    '몇몇 사람이 유대 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신도들을 가르쳤다. “여러분이 모세 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드디어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로 바울 과 바나바 와 신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게 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 보게 하였다.'
    (사도행전 15:1, 2 새번역)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과 장로들과 공개적인 회의 및 논의를 거쳐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공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이런 공개적인 논의와 논쟁이 심지어 초대교회 당시에도 가능했는데 지금의 한국교회는 성도들의 모든 정당한 의견개진과 논의를 이끌어내는 문제제기를 개인의 건방진 '비판'의 시각으로만 바라보니 참 안타깝기그지 없네요.


    교회생활을 하며 타성에 젖은 관행이 꼭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교우들의 다양한 의견과 문제제기와 건강한 소통은 교회의 건강함과 공공성을 더욱 살리고 많은 불합리한 관행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무례함과 폭력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교회가 더욱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성숙한 목소리가 되게 할 것입니다.


    교인들의 목소리를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얼핏 경건해 보이고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나 교회도 망치고 교우들의 신앙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 ?
    백형진 2014.05.17 08:50
    댓글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1.위 글은 제가 3-4년 전에 예전 교회에 다닐때 목회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에 대해 없는 용기를 내서 공개적으로 게시한 글입니다. 성경에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있지만 분별하고 권고하고 책망하라는 내용도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위글에서 그 권고나,책망,경고의 대상에서 교회의 지도자나 목회자를 제외 시킨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글의 중점을 누구든지 권고나 책망이나 경고를 해야할 때는 해야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바른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쓴글인데.....,

    물론 교회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는 만큼 그 분들에게 권면이나 경고를 하는 것은 더 많은 조심성이 필요하겠지요.


    2.그리고 '비판'이라는 단어와 '권고', '권면', '경고' 이런 단어들을 구별해서 쓴 성경의 뜻을 살펴보고자 한것입니다.

    '건전한 비판'이라고 하지만, '비판'을 하는 측에서는 항상 본인의 생각이 건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각은 조심해야 겠죠. 예수님이 아주 명시적으로 천국의 헌법이라고도 하는 산상수훈에 "비판하지 말라"고 못을 박은 점을 감안하자면요.

    그런데 위에서 사용한 용어를 살펴보자면 님께서 말씀하시는 '건전한 비판'은 제가 몇가지 적어놓은 '권고', '권면', '책망' '경고'이런 것들로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그 조심성이나 태도에 관해서는 본 글에서 길게 썼으니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제외 할 신분이나 지위를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3. 위글은 도입부의 작은 글씨 들을 빼고는 모두 3-4년 전에 쓴글입니다. 그러니 제가 직접적으로 님을 대상으로 해서 글을 썼다는 오해는 사실일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상황에 이글이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겠지요.
    어쨌든 이 글은 읽는 모든 분들께 부족한 생각을 나눠보고자 쓴글입니다.
  • ?
    백형진 2014.05.17 09:11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완전할 수 없는 지성과 분별력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라면 이해는 가지만” 님께서 적은 놓으신 이런 뜻으로 이해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의 분별력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권고나 권면을 할때 유의해야할 그 태도들에 대해서는 성령의 내주와 인도하심이 있다면 성령(예수)의 성품인 사랑과 온유와 배려하는 마음과 조심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대한 기록이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기마음대로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스스로 말들을 하니,
    그에 대한 분별은 그 표현들을 지켜보는 상대방이나 제 3자들이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님께서도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으로 하신거라면 너무 괘념치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실거니까 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저는 교회의 질서에 대한 바르지 못한 태도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비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엄하게 다루시는지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물론 내 생각이겠지요)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조심스럽게 하신 일들이라면 하나님께서 다 알고 잘 처리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권대원 2014.05.19 11:08
    아쉽네요...전 저를 위해 뜨겁게 기도해주시고 글을 올려주신 줄 알고 내심 감동했는데...제 글때문에 이글을 올리신게 아니라니..ㅠㅠ;

    '교회의 질서'에 대한 바르지 못한 태도라는 건 혹시 '상명하복'의 말잘듣는 순종의 미덕을 말씀하신 것인가요? 그런 질서가 옳은 질서라는 생각은 동의할 수 없군요. 그 근거가 무엇인지 님께서는 근거도 희박한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의 고정관념을 자꾸 성경적이라 여기시는 것 같은데요.고정관념같이 생각하시는 부분의 교회사적, 성경적 근거를 좀 더 살피면서 논의를 이어가시면 좋겠습니다. 담임목사님, 당회, 장로님, 안수집사, 부목사, 간사는 상하구조가 아니라 교회의 행정적 필요에 의한 직분이며, 신분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옳은 것은 하나님의 종인 목사나 직분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와 교인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거죠. '하나님의 종'<'하나님의 자녀' 어떤 역학관계인지 아시겠습니까? 물론 섬김을 받는 교인들은 섬겨주는 목사와 직분자들을 존경하며 사랑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죠. 상하관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굳이 질서를 따져야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교인들의 의견이 최우선으로 존중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에 굳이 총회헌법까지 들먹이는 것이 오버인것 같긴하지만 님께서 '교회의 질서'를 너무 너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 헌법 '헌법적 규칙' 제3조를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제 3 조 교인의 권리(權利)
    교회의 주권과 모든 권리는 교인에게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와 비슷한 맥락이죠)

    총회헌법 링크:
    http://www.gapck.org/sub_06/sub06_01.asp

    아시겠습니까? 자꾸 질서 운운하시면서 교인들의 목소리를 마치 교회의 질서를 흔드는 불순한 의도로 해석하시는 님의 시각이 상당히 근거없는 불순한 시각인겁니다.

    그리고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비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엄하게 다루시는지'를 그토록 잘아신다면 님께서도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시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자기는 예외인듯이 말씀하시는데 제가 볼땐 미숙하고 어설픈 고정관념을 성경적인데다 올바른 생각으로 착각하시면서 논지를 벗어난 딴지를 자꾸 거는 것 같으니까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인지, 자신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아닌지 한번 더 꼼꼼하게 점검하신 후에 반박하는 댓글을 다시면 좋겠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완곡하든 직접적이든 뻔히 보이는 의도를 정직하게 밝히지 않고, 그 의도를 따지니까 꼬리를 내리는 비겁한 태도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협박하는 듯한 글을 굉장히 불쾌해하고 싫어합니다. 님께서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글은 삼가해주세요.
  • ?
    백형진 2014.05.19 13:37
    자꾸 안한말을 했다고 넘겨짚으시네요. 전 '교회의 질서'에 대해 님 댓글처럼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님은 자꾸 안쓴글, 안한말을 한것처럼 댓글을 다시네요. 그에 대한 생각은 기회가 되면 포스팅을 하나 하던가 하지요. 자꾸 전에 쓴글을 재탕을 하게 되서 망설여지긴 하지만요.

    제가 쓴 글이 딴지로 느껴지신다면, 님이쓴 몇가지 글들도 그 대상이 되는 분들에게 혹여 '딴지'로 느껴질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또 두려워하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조심하자는 뜻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권대원 2014.05.19 19:40
    자꾸 논점을 이해 못하시는데...딴지거는 걸 문제삼는게 아닙니다.내 글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정답도 아니고~당연히 헛점이나 약점이 발견될 수 있고 그렇기에 딴지거는 행위처럼 보이는 모든 대화와 논의는 소중합니다. 애초에 제가 글을 쓴 목적도 모두가 의심없이 정답이라고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딴지를 걸어서 더 많은 생각과 논의를 끌어내기 위한 거니까요. 제가 님에게 요구한 건 님이 주장하시는 반론이나 딴지가 (제가 보기엔) 교회생활을 하면서 형성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이의를 제기하니까 그 부분에 신중을 더해보시고 생각을 더 해보신후에 논의를 이어가자는 이야기 였습니다. 뭔가 교인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비판이나 신학적 검증이 필요한 불순한 의도로 폄하한다든지, 톰 라이트나 김세윤 박사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주장을 '사회참여'가 들어갔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해방신학'으로 폄하한다든지~이러진 말자는 겁니다.

    우리는 애들이 아니잖아요? 교회에서 형성된 문화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 어떤 사안의 논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제 글에 딴지거세요. 대환영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정교한 교리적, 신학적, 논리적 근거에 기반한 딴지를 거시기 바랍니다. 그게 제 요구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딴지는 걸면 걸수록 풍성한 논의가 나오니 좋은 겁니다.
  • ?
    백형진 2014.05.19 16:32
    저는 하나님 안에 있는 전체교인에게 교회의 모든 권리가 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전체 교인이 그 권리의 많은 부분을 교회기관과 직분자에게 위임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위임한 부분에 한해서는 몇몇 소수의 교인들의 주장보다는 전체교인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의사기관이 존중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 위임받은 그룹이 심각한 남용을 한다면 그 상위기관인 공동의회등에 따라 바로 잡혀야 겠지요. 일부 교인들의 의사표현만으로 될일은 아닙니다.
  • ?
    권대원 2014.05.19 19:56
    일부교인들의 의사표현대로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자고 논의를 꺼낸게 아니지나요. 님은 그럴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이나 어떤 행위에 대해 님의 프레임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님의 표현대로 하지도 않은 말을 넘겨 짚는거지요)

    위임받는 기관이 주권을 가진 교인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 위임받은 기관이나 직분자인 당회장로님들니나 부목사님들, 아니면 담임목사님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할까요? 한명 한명 다 만나서?

    만일 그런 의미라면 님이야말로 교회질서를 이야기하지만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시는 겁니다. 저 멀리 전병욱 목사의 사임과정과 전별금의 내역을 요구한 67명 성도들의 '공동요청문'부터 최근에 A관 재건축 문제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은 이 게시판을 활용해서 교회의 공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 이의를 제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것이야말로 한국교회에서 보기 드물었던 삼일교회만의 건강한 소통의 모범이었구요.

    교회의 공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의 주권을 가진 교인이 공적인 채널을 통해 의견을 제기하고 질문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정도로 열린 모습이며 건강한 모습입니다. 근데 교회의 문제에 대해 '위임기관'에 맡기고 그 처분을 기다리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거라면 그 건강한 소통을 억압하는 요구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겁니다.

    몇몇 소수 교인들이 의견을 밝힌다고 해서 그 행위가 위임기관을 무시한다는 생각이야말로 편견아닐까요? 용기있게 이렇게 님이 비판에 대한 글을 올리셨는데 위임기관이라 칭하시는 (그게 뭔지 모르겠으나, 아마 당회장로님이나 목사님들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그 기관의 허락을 맞고 올리신 겁니까?

    교인이 게시판에 공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위임기관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교회를 움직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만일 그렇게 보신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진짜 불순한거죠).

    도리어 교회의 행정적 절차와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위임기관에게 적극적인 주권을 가진 교인으로서 의사소통과 건의를 하는거죠. 위임기관에 교인이 의견을 개진하려면 담당자들을 개인적으로 다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봉건영즈시대의 조직쯤으로 교회조직을 오해하신 것 같군요.
  • ?
    백형진 2014.05.19 20:17
    제가 안된다고 한적은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런 기관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여러 말들을 한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위의 사건들은 비상적인 상황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항상 그렇게 비상적인 모양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비상적인 상황에서 이런 게시판이 선하게 이용될수 있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상적인 상황으로 가기전에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게시판이라는 곳은 파급력이 크고 선동의 용도로도 사용될수 있는 위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그랬다는 뜻으로 쓴건 아닙니다. 이런 매체 자체가 항상 그런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 ?
    한준희 2014.05.20 12:47
    게시판에 대한 저의 간단한 의견 한마디 나눕니다.

    솔직히~~~

    요 몇일 올라온 게시물 중 권** 형제님, 백** 형제님께서 올리시는 글들 도저히 읽지 못하겠습니다.
    난독증인가봅니다.

    엄청 길고...
    필력들 참 좋으십니다.
    저는 그정도 따라가기엔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사람이라 이제 스크롤 해야 보이는 그런 긴 글들은 읽지 않으려 합니다.


    선동의 용도라는 말씀 너무도 정겹습니다. 방송에서? 많이 듣는 말투네요. 그렇습니다. 선동의 소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선하게 동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이런 도구는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좀 짧게 올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발 .... 주일에 만나서 이야기하십시요. 주일에 그리들 바쁘십니까? 다들???

    그리고 정의에 오류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가 반응하는 그런 글들을 천천히 서서히 써가셨으면 합니다.

    제발 그들만의 리그는 그만 만들었으면 합니다.
  • ?
    신창조 2014.05.21 12:39
    글을 자주 쓰고 길게 쓰는건 잘못이 아닙니다.
    물론 하고픈 말을 짧게 간단히 적을 수 있지만, 글이라는게 뉘앙스를 느끼기 힘들어서 설명하느라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너무 길어서 읽지 않겠다고 하시면, 글을 길게 쓴 분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 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읽기 싫으면 그냥 조용히 뒤로가기를 누르시면 되요.

    게시판에 올리는 글은 누굴 만나서 1:1로 하기보단 다수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만나서 이야기 하란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민지 모르겠지만,
    한준희님도 권**형제님, 백**형제님을 주일에 만나서 이야기 하시지 왜 댓글을 남기시나요?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는 그들이 만드는게 아니라 동참하지 않는 우리가 만드는 겁니다.
    그 리그에 무슨 자격증이나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필요한건 글을 읽고 생각할 시간과 글을 쓸 시간 정도 뿐이겠죠.
    한준희님이 댓글을 적어주셨기때문에 한준희님에겐 더 이상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된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앞에 길게 쓴 글에 대해서도, 한준희님이 "긴 글은 읽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이셨기때문에, 아마 한준희님도 읽길 바라는 분들은 글을 최대한 짧게 쓰려고 노력하겠죠.

    이게 참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만의 리그를 우리의 리그로 만드는거죠.
    저도 그들만의 리그는 싫거든요.
  • ?
    한준희 2014.05.21 14:06
    예 옳고 지당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 ?
    정규민 2014.05.20 11:32
    마태복음 7장의 비판은 judge 정죄와 심판으로 번역해야하는데 criticise라는 옳고 그르음을 분별해내는 비판이라는 단어로 오역한 것이고, 로마서14장도 judgement (판단)를 비판이라는 단어로 오역해 놓았네요. 제가 권대원님의 글을 읽을 때에는 간음한 여인 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글은 보지 못했던 것 같구요,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같은 배우고, 힘이 있으며,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에 대한 건강한 비판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파급력이 큰 게시판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말씀이라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매체는 참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을 숨기고 싶은 자들에게는 위험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