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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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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나누고자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일 알고 있는 두 분을 소개 하고자 합니다.

먼저는 이영식 목사님, 한 분은 장애인건축 1인자 강병근 교수님입니다.

한 분은 고인이 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그분들의 스토리를 알면 삼일교회 청년들이 도움이 되고,

장애인이신 분들도 이런 분들이 노력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좋을까 해서 올립니다.


이영식 목사님( 만인 복지실현- 대구대학교 설립자)

“공산당원들이 나를 뒷 동리로 끌고 가서 사격장에 세웠을 때, 나는 틀림없이 마지막을 당했다고 생자했지요.” 이 영식 목사는 고소(苦笑)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이상하게도 주검의 무서움이라든가 내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든가 하는 고통은 없었고, 오직 내가 사는 동안 너무도 한일이 없었다는 자책감(自責感)을 느낀 것이었지요.”

이 영식 목사는 9년 동안 대구 시외에 있는 친명이나 되는 문둥병자 수용소에서 목사 일을 본 분이었다. 그는 문둥병을 두려위하지 않았다. 무서운 병에 걸려서 모양 없이 된 불쌍한 환자들과 그는 매일 섞여서 지내왔다. 그는 이 병이 비록 보기에는 그렇게 흉악(凶惡) 하나, 결핵(結核), 장질부사(長疾扶斯), 적리(赤痢), 임질(淋疾) 같은 병보다 덜 무서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통하여 많은 문둥병자들이 좋은 기독교인이 되고 있었다. 대개 수용소(收容所)에 들어오기 건에는 믿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무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시는 것은 곧 알게 되는 것이었다.

나이 많은 눈 먼(盲者) 환자들은 성경을 수 천 절이나 월 수 있었다. 이럴 때에 그들의 부은 얼굴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빛이 빛나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건 때에 이 목사는 일본(日本)에 가 있었다. ‘교도’(京都), 저 유명한 우상 신전의 도시, 전쟁공업 시설이 없다고 해서 미국의 공습(攻襲)을 받지 않은 ‘교도’에서 그는 맹아학교(盲啞學校)를 알게 되었다. 눈 감은 어린이들이 손으로 글을 일고, 귀 먹은 어린이들이 입술을 보며 말을 배우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은 뛰었다. 고향인 대구(大邱)에 그런 학교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고동(鼓動)된 것이었다. 둘론 서울이나 평양(平壤)에는 그런 기관이 있었어도 대구에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굳은 결심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동시에 그는 대구 형무소(刑務所)에서 교화목사(敎化牧師)의 일을 시작하였다. 1946년 저 유명한 십일사건(十一事件) 때에 그는 형무소 목자로 있었다. 수용된 공산당을 목사는 최선을 다하여 교도(敎導)하였다. 물론 공산당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이 목사는 ‘교도’의 맹아학교(盲啞學校)를 졸업하고 점자(點字)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또 아자(啞者)를 가르칠 수 있는 부인도 한 사람 만나게 되었다. 맹아 학생들은 쉴게 모을 수 있었다.

어떤 날 이 목사는 선교부(宣敎部)를 찾아 와서 다 파괴된 채 수리되지 않은 선교사 집 한 채의 사용허가를 구하였다. 그 집이라고 하는 것은 문도 창도 없었으며 떨어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 목사는 이 냉큼한 집의 사용 허락을 받아 학교를 시작한 것이다. 창문에는 종이를 바르고 문짝 대신으로는 휘장을 했다. 많은 어린이들이 거기서 살았다. 불(火)이라고는 오직 깡통에 피는 숯 불 뿐이었다. 그런데 숯불은 어린이들의 몸에 위험하기 때문에 그것도 마음대로 못 피우도록 규정될 수밖에 없다고 선교부는 주장했던 것이었다.

1950년 여름 공산당의 남침(南侵)이 점점 대구로 육박(肉迫)해오자 이 목사는 낙동강(洛東江) 저쪽 성주군에 사는 친척과 친구들의 형편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그는 강을 건너 그들을 찾아가서 같이 피난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강으로 되돌아 와 보니 강 길은 끊기고 미국 군인들이 길을 지키 있었다. 피난민은 한 사람도 강을 건너 남하(南下)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피난민의 이동은 길을 막게 되고 전투(戰鬪)를 방해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 목사와 친척 친구들은 섭섭히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목사는 할 수 있는 대로 숨으려 했으나 결국은 공산경찰에게 체포(逮捕)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아 사형(死刑)을 받게 되었는데I 그 죄는 아래의 세 가지였다.

첫째로, 그는 반동정권(反動政權)의 경찰이었다는 것.

둘째로, 기독교인이었으니까 우익분자(右翼分子)이었다는 것.

셋째로, 목사였으니까, 미국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주구(走狗)라는 것 이었다.

사격반(射擊班)의 처형(處刑)이 가까와 올 때에 이 목사는 끝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悔改)할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의 회개는 어떤 범죄에 대한 것이나 거짓과 증오와 간악한 행위에 대한 회개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 사무친 고통은 그가 살아 온 길이 너무도 가치가 없었다는데 대한 것이었다. 그가 남을 위하여 살아야 될 줄 알면서도 그 아는 대로 남을 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었다.

“나를 쏘기(射) 전에 잠간 기도할 시간을 주시기 원합니다.” 이목사는 책임장교에게 구하였다. 장교는 힐긋 이 이상한 간청에 놀라며 측은한 눈초리로 허락했다. “좋다, 그러나 빨리 해라.”

이 목사가 땅위에 꿇어 앉아 기도를 드리려 하는 순간, 사격반원(射擊班員)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게 되었다.

“저 사람, 저 사람, 아는 사람이다. 그럼! 내가 대구 형무소에 있을 때 저 사람이 있었지‥‥ 저 사람은 우리를 친절이 대했어‥‥ 다른 순경들 같지 않고‥‥‥ 아 저 사람은 우리 당원들에게 아주 좋게 대해 주었지.”

동료의 말을 의미 깊게 듣던 책임 장교는 이 목사를 향하여 소러를 질렀다. “뭐라고 할 말이 없는가?” 이 목사는 기회가 은줄 알고 끝까지 다 말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으신 친구요, 나 뿐 아니라 불쌍하고 가난한 보든 인민들의 친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나도 그를 따르는 신자입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나는 누구의 주구도 아니요 오직 우리 국민들의 불행을 돕기 위한 목사입니다. 내가 순경들이 관할하는 형무소에서 일한 것은, 거기 수용된 이들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지요. 저 분이 말해 준 것처럼 나는 형무소에 수용된 분들을 도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다른 불행한 분들도 도우려고 애써 왔지요. 9년 동안 나는 우리 국민들의 문둥병자를 위해서 일해 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자리가 없어서 수용소에 들어오지 못하고 집에서 앓는 불행한 문둥 환자가 많이 있어요. 그들의 고통은 크고 가진 것은 없어요.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또 그 밖에도 우리 동포들 중에는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나는 대구에 이 맹아들을 위한 작은 학교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내가 죽는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지요. 나는 죽는 것, 무섭지 않아요.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요. 나는 영생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누가 저 불쌍한 맹아들을 돌볼 것인지? 누가 저 불쌍한 문둥환자들을 돌 볼 것이겠소?”

그는 장교에게로 향하며 말했다. “만일 당신의 어린 딸이 앞을 못 본다고 하고 또 그애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이를 누가 죽인다고 하면 당신은 어떨 것이요?”

 

그 장교는 신기한 눈으로 이 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죽일 수 없지‥‥‥‥” 그는 크게 고함질렀다. “뛰라!” 그리고는 부하에게 말하기를 “도망가는 대로 버려두라.” 이 목사는 자기가 뛰는 동안에 건에 들은 말과 같이 공산당이 잔등을 쏠 줄로 생각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숨이 끝나고 의복이 땀으로 젖어 버릴 때까지 산을 향해서 뛰었다. 그는 ‘맥아더’(MacArthur)장군이 인천(仁川)에 상륙하고 공산당이 북으로 도망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살아 나왔다.

이 목사는 자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을 찾아 대구로 돌아 왔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데서 살아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시로부터 어떤 부서진 집 한 채의 사용허가(使用許可)를 얻었다. 선교회는 그 집을 수선(修繕)할 돈을 얼마간 얻어 들이었다. 그는 창에 유리문을 넣고 마루를 갈았다. 한국을 방문하던 ‘밥 피어스’(Bob Pierce) 박사의 도움과 ‘존 밀톤회’(JohnMilton Sooiety)의 도움으로 그 학교는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공부가 정식으로 시작되고 새 선생들이 채용되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점사판(點寫版)이 입수되었다. 어린이들은 ‘가나다’를 배우기 시작하고, 벙어리 어린이들은 ‘아어오유이’를 발성 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끝나게 될 즈음부터 전쟁의 무서운 결과는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이 유황탄(硫黃彈)에 맞아 얼굴은 변형(變形)되고 눈을 잃었다. 부모를 죽인 무서운 폭탄은 남은 어린이들의 눈을 멀게 했으며, 사랑하는 길을 없어지게 한 폭격은 그 무서운 소리로 귀를 멀게 하였다. 하나 둘씩 이들은 이 목사가 경영하는 학교로 찾아 들게 되었다. 이 목사는 보두 받아 들였다. 마음 넓은 이목사 확인은 두 팔을 펴서 찾아 드는 불쌍한 어린이를 어머니의 사랑으로 받아 안았다. 이 목사의 자은 집은 이 어린이들로 우굴거렸다. 맹아(盲兒)들은 처음에는 하나씩 먹여 주어야 했으며 차차 스스로 먹기를 배우게 되었다.

이 목사 맹아생(盲兒生)중에 재간 있는 어린이 몇을 공립학교를 데리고 나가서 그들이 배운 것을 보여 주었다. 이들을 통하여 손 때 묻은 지폐(紙幣)가 모여져서 학교는 유지되어갔다.

1952년 봄에 이 목사는 몇 명의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일보러 나왔던 미국 민사 원조처직원들은 이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한 소경된 처녀 아이는 손가락을 사용해가며 졸업식 연설을 하고, 그 옆에 선 벙어리 남자는 연설하는 소경의 입술을 보고 손가락으로 다른 벙어리에게 통역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 있는 맹아들이 일제히 “주의 말씀 듣고서 준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터 닦고 집을 짓는 잘세”를 부르면 건너편에 앉은 벙어리들은 선생의 인도함으로 손을 펴서 그 뜻을 형용으로 반주(伴奏)하는 것이었다. 소경과 벙어리의 함창 !

 

이 교장은 어린이들이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을 배움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자력으로 독립 생활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구두 짓는 집 하나, 수건, 공장 하나, 그리고 농사터를 준비하였다. 맹아들이 자라서 믿지 않는 나라에서 처럼 거지 생황을 하게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이들에게 생계(生計)를 교육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 그러스도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다. ‘찰스 웨슬레’가 희망하던 “만입(萬口)”의 찬송이 어린 맹아들에 의해서도 불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친히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이세.” 진실로 이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심을 잘 알고 있다. 예수의 사랑은 이들에게 따뜻한 잘 곳과 먹을 것을 주었으며, 익고 쓰고 세상에 뵈는 것을 배우는 학교를 주셨을 뿐 아니라, 뵈지 않는세상의 일을 배울 길도 준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팔과 그들을 인도하는 다정한 손을 통하여 배워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신다. 참으로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신다. 이 영식 목사와 그의 마음 넓은 부인의 심령 속에 이 예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이 목사의 명성(名聲)이 차차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미국에 있는 제 3군은 군목비(軍牧費)로 5,000불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돈을 어데다 쓸 것인가? 이 세상에서 제일 도움이 필요한 한국에 제 3군 군목은 대구에 있는 통신대 군목 ‘에스티스’(Estes)에게 편지를 내었다. “이 돈을 쓸 수 있는 제인 좋은 사업은 무엇일까?”하고, ‘대구의 등대(燈臺) 맹아학교(盲啞學校)’라고 회답은 갔다.

장로교 선교회는 5,000불을 더 보태었다. 주한 민사 원조회는 약 12,000불 가치의 물자를 제공하였다. 주한 미국(美國) 군사고문단(軍事顧問團)도 원조의 손을 써 주었다. 미국(美國)해외(海外) 맹인재단(盲人財團)에서 충당금을 보내왔다. ‘밥 피어스’(Bob Pierce) 박사도 선물을 보내왔다. 대구시에서는 구 공동묘지를 청소 정리하여 사용하도록 할당해 주었다.

1953년 가을까지에는 부엌 식당 목욕탕이 있는 기숙사(寄宿舍)가 건립되었다. 이 기숙사 헌당식(獻堂式)에는 경북도지사, 대구시장, 미군사령관 ‘론톤’(Lawton) 장군 등이 출석하여 식을 빛나게 해 주었다. 미국 수도 와싱톤(Washington, D.C.)에서는 군목(감軍牧監) ‘이반베 릴’(Ivan Bennett) 장군이 오게 되어 있었으나, 당일 갑자기 생긴 공무로 오지 못하였다.

소경과 벙어리 어린이들이 함창을 했을 때에 백전(百戰)의 경험으로 잔뼈를 굵게 한 노 장군 사령관은 감격에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지금 미국 해외 맹인재단은 육군의 원조 물자의 보충을 받아 이층의 훌륭한 교사(校舍)를 짓고 있다. 어린이들도 역시 놀지 않고 공사를 돕고 있다. 이 교장은 이들을 맹아(盲兒) 아아(啞兒)의 순서로 나란히 세워 놓고, 트럭이 싣고 온 벽돌을 집 짓는 곳까지 한손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는 것이다. 벙어리 어린이들은 벽돌을 받는 대로옆에서 손을 들고 기다리고 섰는 소경 아이의 손에 곡 건해 줄수 있다. 이렇게 벽돌은 한장씩 한장씩 손에서 손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하기를 재미나는 유희로 알고 열심 있게 잘 하는 것이다. 이 목사는 이들을 잘 훈련시켜서 벙어리가 소경아이를 잘 이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피차에 도우면서 즐겁게 유희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지금 좋은 위치에 우뚝 서서 큰 인물들의 방문처(訪問處)가 되어 있다. 한국에서 국제연합군(國際聯合軍) 사령관(司令官)을 지낸 ‘밴 플맅’"(James Van Fleet) 장군이 특사(特使)로 잠시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그는 이 맹아학교로 안내함을 받았었다. 극동 사령관(極東司令官) ‘헐’부인(Mrs. Hull)은 이 학교를 보기 위하여 특별 비행기로 와서 저 늙은 군인이 한 것과 같이 눈물을 홀리고 돌아갔다.

이 목사는 아직도 큰 꿈을 꾸고 있다. 그의 눈은 장래에 여기에 이루어질 예배당, 고등학교, 기술학교, 운동장, 농장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그렇게 실현될 줄로 안다. 그러나 이 목사는 일만 하고 쉴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직도 정든 옛 문둥 병원을 잊지 않고 있다. 이 놀랄만한 사람은 주일이면 외로운 대구 시외에 시설(施設)해 놓은 문둥병자 촌을 찾아가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그 곳에 그는 교회를 설립했다. 주한 제5공군(駐韓第五空軍) 소속제 58폭격대(爆擊隊)가 공급해 준 자재는 훌륭한 예배당이 된 것이다. “교인은 얼마나 됩니까?” 하는 물음에 “600명 가량 되지요.” 이 목사는 대답한다. “이들이 이 촌으로 오기 전에, 믿는 사람은 몇이나 있었을까요?” 나는 나이 많은 집사에게 물었다. “한 사람도 없었지요. 이 목사님을 만나기 건에 믿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를 만나자 모두 예수 믿기를 원했어요.” 하는 것은 집사의 대답이었다.

이 목사는 그저 빙긋 웃으며 말한다. “공산당이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주님께서 이제는 좀 값있는 생을 살라고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주신 것이었지요. 그런데 내 갈 길은 아직도 멉니다.”

이 책은 ‘韓人 心中의 그리스도’(英韓合本)의 2장 내용이다.

신학박사 갑부열 저

신학박사 김윤국 역

가남사 1986년 4월 15일 2판 발행

강병근 교수님-건국대학교 정교수 보건복지부 장애인 종합체육시설 건립추진위원

만약 거제도 장승포에 배를 타고 간다면 장승포에 다다를 즈음 멀리 언덕 위에 들어선 빨간 지붕에 하얀 건물이 눈에 띌 것이다. 마치 남국의 어느 바닷가 별장이나 콘도처럼 멋져 보이는 그 건물을 보고 “오늘 밤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저 곳에서 묵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런데 이 멋진 건물은 다름 아닌 정신지체아들이 살고 있는 애광원이다.

여느 관광지 호텔보다 더 근사한 이 건물을 설계한 주인공은 건국대 건축과 강병근교수(45). 강박사는 아주 우연하게 애광원과 인연을 맺게 됐다. 애광원과 강박사의 인연을 줏어듣고 강박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예상대로 난색을 표한다. ‘다행히도’ 너무 바쁜 그는 애광원에 내려가는 날 외에는 짬이 없었다. 애광원으로 떠나는 월요일 아침 비행기 시간을 알아내 마침내 김해공항에서 거제도 장승포로 가는 헬리콥터 안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강박사가 처음 애광원을 방문했던 84년 4월 이후 그는 수없이 비행기를 타고 헬기를 타고, 또 어떤 때는 차를 몰고 배를 타고, 또 트럭에 자재를 가득 싣고 거제도의 이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애광원에 다다르니 웬 키작은 할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강박사를 반갑게 맞았다. 바로 애광원 원장 김임순씨(72)였다.

본래 애광원은 6?5전쟁 직후 생긴 고아들을 거두는 영아원이었다가 78년부터 정신지체아 시설로 바뀌었다. 애광원을 설립한 김원장은 거제도로 피난와 이곳에 아주 머물게 됐다고.

“6월25일이 바로 아버님 환갑날이었어요. 친정인 상주에서 잔치를 치른 후 전 임신한 상태여서 친정에 머물렀지요.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시부모님께서 거제도로 피란을 가셨다고 해서 51년 거제도로 왔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를 열심히 나가는 그를 당시 사회부(현재의 보건복지부) 거제분실 장이 불렀다.

“저를 데리고 언덕바지에 있는 피란민 막사로 데리고 가요. 가마니때기를 들치고 들어간 그곳엔 탯줄도 아직 안 떨어진 갓난 애기들이 줄줄이 누워 있어요. 당시 고아원 시설은 있지만 영아시설은 없으니 좀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자신의 딸은 잊어버리고 그는 그 아기들과 울면서 밤을 새웠다. 전쟁으로 다시 만날 수 없었던 남편을 둔 그는 자기 설움에 울고 아기들은 배가 고파 울고.

“페스탈로치도 있지만 저는 정말 아기들 키울 자신이 없더라구요. 하나님께 제발 다른 일 시켜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새벽종이 울릴 무렵 어떤 목소리가 들려요. ‘니가 왜 걔들 수준으로 떨어지려고 하느냐, 그 아이들을 네 수준으로 올리면 되지 않느냐’고요.”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 평생토록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는 “이 삶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경북 상주 출신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인텔리여성이었던 김임순씨는 이 아이들에게 붙잡혀 스스로 고난의 삶을 선택한다. 시어머니가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그는 계속 거제도에 머물며 애광원과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제가 직접 집을 짓고 아이들을 돌봤지요. 강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설계도 직접 하구요.”

움막 수준이던 애광원이 이런 멋진 건물로 변모하게 된 계기는 83년 김원장이 애광원의 후원단체이자 자매결연을 한 독일 프뢰벨학교를 방문한 것이 싹이 되었다. 너무나 훌륭하게 지은 그 학교를 둘러본 후 김원장은 교장실에서 차를 마시게 됐다.

“그 학교가 부러운 것도 아니고 내가 억울하지도 않은데 그 자리에 앉았더니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도저히 멈출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이 펑펑 우니까 날 데리고 갔던 독일목사 부부와 교장도 함께 울더군요.”

단지 마흔여덟명의 장애인을 위해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그 프뢰벨학교에서 아마 김원장은 보잘것없는 애광원에 있는 아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원장이라는 말을 듣기도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훌륭한 숙소와 학교를 짓고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으니 설계 청사진이라도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죠.”

그러자 그 교장이 “당신이 이곳을 방문한 첫 한국인이 아니다. 강병근이라는 건축가가 처음 이곳을 찾아왔다”며 그를 아느냐고 물었다. 귀가 번쩍 뜨인 김원장은 도대체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서베를린에 있다는 말을 듣자 그 길로 비행기표를 마련해달라고 후원자인 목사부부에게 매달렸다.

독일의 작은 학교에서 맺어진 기묘한 인연

참 이상한 인연이었다. 프뢰벨학교는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아주 작은 도시에 있는 조그만 학교였다. 강박사는 당시 서베를린 공대에 유학중이었는데 박사학위 논문이 장애인시설 건축이었으므로 짬짬이 장애인시설을 둘러보곤 했다. 프뢰벨학교도 물어물어 찾아간 학교였다.

“그 학교 교장이 저의 연락처를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참 놀라운 일이었죠. 아마 임신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온 한국인이어서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강박사는 그날 밤 김원장의 전화를 받게 된다. 강박사가 워낙 바빠 직접 만나지는 못했고 김원장 역시 단 이틀밖에 서베를린에 머물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속으로 “언젠가는 그 건축가가 한국으로 돌아오겠지”하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왔다.

김원장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뒤 강박사는 이번에는 두툼한 편지를 받게 된다.

“노란 공책 종이 다섯장 빽빽이 쓴 편지에는 애광원을 키워온 과정, 현재의 상황 등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편지 끝에는 ‘이 다음은 말로 하겠다’며 녹음 테이프를 동봉했더군요.”

그 열정적인 하소연을 듣고 강박사는 애광원이 어떤 곳인지 이해하게 됐을 뿐 아니라 김원장이 대단한 분이라는 것, 그리고 감동까지 느끼게 됐다.

당시 애광원은 정부의 장애인 요양시설 건립 보조금을 따기 위해 신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설계를 해줄 사람도 없었고, 평소 직접 설계를 해왔던 김원장은 독일의 학교를 보고온 이후 도저히 설계할 마음이 안 생겼다. 그런 다급한 상태에서 84년 4월 초 강박사의 전화가 왔다. 당시 강박사는 영남대에서 열리는 건축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교수들과 함께 한국에 왔던 것이다.

“단지 전화가 왔다는 말만 듣고 강박사를 찾기 시작하여 오후에나 연락이 닿았어요.”

강박사는 하루 종일 회의장을 옮겨 다녔는데 오후에 방송이 들리더란다. “강병근박사님은 빨리 전화를 받으라”는. 마침내 통화가 되자 김원장은 대뜸 “빨리 거제도로 택시를 타고 오시오. 택시 삯은 내가 내겠소” 했다. 물론 김원장은 돈도 없으면서 무조건 떼를 쓴 것이었다.

“사실 그때 독일 교수들은 해인사를 꼭 들러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찾는 김원장님의 요청이 워낙 다급하다는 걸 알고 애광원부터 가자고 하더군요.”

저녁에 대구를 출발한 강박사 일행이 거제도에 닿은 것은 새벽 1시였다. 처음 대면한 이들은 동이 틀 때까지 얘기를 나누고 김원장은 새벽 4시에 강박사를 이끌고 도대체 어디에 집을 짓는 게 좋겠느냐며 애광원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때 강박사는 풍향과 기후조건, 지세들을 면밀히 관찰 조사하고 사진을 찍고 대강 측량을 한 다음 돌아갔다.

“그때 제가 강박사님께 대접한 것은 빵 한조각밖에 없었어요.”

본래 얌전한 성격이던 김원장은 애광원 일을 하면서부터 괄괄한 여장부로 바뀌었다. 지체아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바른 말을 하며 정부 기관에도 호통을 쳐대는 통에 별명도 호랑이할머니, 깡패할머니, 나폴레옹할머니가 아닌가. 그 깡패할머니는 다음날 강박사가 머무는 서울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다방에서 만난 강박사의 손을 끌고 승합차에 태워 납치하다시피 해서 보사부로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 우리는 건축 계획서도 제출 못한 상태였어요. 마감을 몇번이나 넘긴 때였지요. 제가 담당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분이 우리 건물을 지을 분이니 한달만 연기해달라고요.”

그때 강박사가 애광원의 서류를 검토해보니 복도를 가운데 두고 1, 2, 3, 4호실 식으로 일렬배치한 그야말로 수용소 같은 설계도가 있었다. 담당자도 “이건 여관이나 할 수 있지 요양시설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때 제가 일주일 가량 머물 수 있었는데 후배들을 불러 닷새 동안 꼬박 사업계획서를 작성했습니다. 대략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해 여름방학 강박사는 꼼꼼하게 작성한 설계도면을 귀국하는 유학생을 통해 보내왔다.

“하지만 시공이 문제였어요. 물론 대우 쪽에 맡기면 되겠지만 이렇게 복잡한 설계도면을 제가 이해 못하니 감독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해 말까지 착공하지 않으면 취소될 판인데 도저히 자신이 없는 거예요.”

무엇이든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김원장으로서는 제대로 하고 싶은데 능력이 안돼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해가 저물어가는 10월 말 강박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교인 건국대에 부임하게 됐다면서.

“정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닙니까. 제가 돈을 싸들고 건국대에 가도 되지 않을 일인데 저절로 되는 겁니다. 이런 걸 보면 하나님이 지체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해 12월 애광원 ‘민들레집’은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 완공을 보게 됐다.

건축의 시작은 하수도부터

당시 애광원 건물은 52년에 김원장이 직접 지은 움막 같은 집을 포함하여 낡고 보잘 것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여느 시설들과 마찬가지로 하수도 설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비만 오면 오물이 흘러넘치고 냄새가 고약했다.

“먼저 길을 닦고 하수도부터 모았지요. 그게 기본이니까요. 우리 애광원은 아무리 장마가 져도 물이 넘치는 곳이 없어요. 아마 신도시보다 훨씬 나을 걸요.”

배수시설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그 건물의 수명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까지 결정한다.

“얼마 전에 어느 종교시설에서 좀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겉은 근사한데 지하에 있는 방에 습기가 차서 수녀님들이 모두 병을 얻었답니다. 배수로 정비가 안돼 그 지역 물이 전부 그 건물 밑으로 흐르고 있더군요.”

그곳의 지형을 살피지 않은 데다 건축 재료도 맞지 않아 돌들이 물에 젖어 푸석푸석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그곳 사람들의 말에 강박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였다.

“빨리 허무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언제고 삼풍이나 성수대교처럼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강박사의 건축철학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건물들이 겉보기는 번지르르한데 안은 부실하고 지하실은 습기가 차서 쓸모가 없어지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제가 처음 독일 갔을 때 교수가 무얼 전공하겠느냐고 물어요. 그땐 포부도 근사하게 건축심리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교수가 웃으며 하는 말이 ‘그러면 미국에나 가봐라. 우리 독일에서는 아주 실제적인 걸 공부한다’고 해서 얼굴이 화끈했지요.”

미국이나 일본 같은 특이한 건축물에 대한 연구보다 유럽쪽, 특히나 독일쪽은 기본적이고 실제적인 것, 그리고 공학적인 튼튼함을 우선으로 친다. 강박사가 장애시설 건축을 전공으로 삼은 것도 실제적인 주제를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대학이 모두 국립인 독일에서는 논문주제를 국가가 심사하는데 그 기준은 실제 국민생활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추상적인 것으로는 안되는거죠.”

장애인 시설뿐 아니라 모든 건축물은 안전성이 기본이고 그 다음이 실용성, 마지막이 예술성이라고 한다. 강박사가 지은 애광원의 학교나 숙소들을 예로 들자면 우선 어느 건물이나 흰색 벽인데도 균열이 가거나 습기를 먹어 벽이 녹슬거나 때가 낀 흔적이 없다.

그리고 벽 두께가 무척 두껍다. 또 경사진 땅을 구태여 깎지 않고 건물을 세웠으므로 밖에서 보면 5층이지만 어느 방에서나 바로 지상으로 연결되는 평면통로를 마련했다. 특히 장애인 시설이기 때문에 방마다 비상구(출입구는 노란색, 화장실은 파란색, 비상구는 빨간색 문으로 구별돼 있다)가 있는데 그 방문 바로 앞까지 구급차가 닿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중증 장애인 시설인 민들레집의 실내에는 옹이가 박여 값이 싼 목재를 썼고 학교건물 바닥은 전체를 비싼 천연 코르크로 깔았다.

“그래야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아이들이 넘어져도 큰 상처가 안나죠. 만약 시멘트 바닥이라면 위험할 뿐 아니라 수용소처럼 썰렁한 분위기를 냈을 테고 비닐을 깔았다면 벌써 몇번은 바닥을 뜯어내고 다시 깔아야 했을 겁니다.”

교실마다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 이런 단체 시설 특유의 악취가 전혀 나지 않는다. 또 교실 창에는 특별히 고급 차양 스크린을 달았다. 동향이므로 햇살이 눈부실 텐데 이 스크린은 커튼처럼 아이들이 매달려 위험하거나 찢어지거나 때가 탈 염려가 없다. 또 하나 교실 칠판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아래에 자석 칠판이 있고 그 위의 흑판도 아래위로 조절이 가능한 눈 높이 칠판이다.

“외국에는 보통 학교에도 아이들 키에 맞춰 이렇게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이런 장비가 없어요. 할 수 없이 철공소에 가서 가르쳐주면서 만들어달라고 했죠.”

바람이 많이 부는 지방이어서 창문 고리 하나도 일일이 디자인했다. 우리나라에는 싸고도 다양한 기성품이 없으므로 강박사가 모든 걸 직접 재고 고안하고 재료를 구입하여(그것도 영등포에서 싼 값에 사서 트럭으로 싣고 와야 했다) 달게 했다. 그러니 애광원의 건물들은 단순하고 수수하면서도, 세심힌 손길이 가 있으므로 세련된 멋을 풍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물을 세우려면 우선 땅부터 깎고본다. 그러나 강박사는 경사진 땅도 그대로 두고, 멋진 소나무가 있으면 지붕 모양을 살짝 바꿔가면서 건물을 지었다. 그러니 땅 깎는 비용이 안들어가 건축비가 싸게 먹히면서 개성적인 건물을 세울 수 있다. 비탈진 언덕에 세워진 애광원 건물은 경사면을 이용해 유리온실을 지어 꽃이 있는 사무실과 커피하우스를 만들었고 습기 하나 안 차는 지하실은 양곡과 부식창고로 이용하는 등 자투리 공간 하나하나가 알뜰하게 제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콘도 언제 분양할 거요?”

최초로 지은 민들레집과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학교,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그리고 어느날인가 강박사가 자다가 지네에 물린 다음날 포클레인으로 헐어버린 김원장의 낡은 숙소까지 이곳의 건물들은 모두 하얀 벽에 빨간 경사지붕을 하고 있다.

“다른 건축가들은 왜 지붕이 경사져야 하느냐, 또 색깔이 너무 튀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바람이 심한 곳에는 경사지붕이 적합하고 지붕에 공간이 있으니 보온도 되고 열기도 식힐 수 있죠. 또 파란 바닷가에 가장 무난한 색깔이 흰색과 빨간 색입니다.”

경사진 비탈면이 살아있고 요여기저기 아기자기한 정원구실을 하는 잔디밭과 회랑처럼 건물을 이어주는 빨간 지붕을 씌운 연결로 등으로 애광원 건물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느낌을 준다. 나무들 속에 들어선 붉은 지붕의 건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고급 휴양촌처럼 보인다.

“이 건물의 어느 방에서도 바다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콘도 언제 분양하느냐고 물으러 온 사람도 있었어요.”

애광원 총무로 있는 전규대씨의 말이다.

실제로 건물을 짓는 동안 보사부 사람들이 여러번 다녀갔다고 한다.

“원장 별장 짓는다는 소문이 났나봐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시설에서 왜 애광원에는 돈을 많이 주느냐고 항의도 했대요.”

설계비는 물론 공짜인데다 시공비도 당연히 쌌다. 중요한 것, 꼭 필요한 것은 비싼 자재를 썼지만(그래서 다시 뜯거나 보충할 필요가 없으니 장기적으로는 더 싸게 먹혔다) 되도록 실용적이고 보편적인 자재를 선택했고 웬만한 연결로나 바닥 카펫은 직원들이 직접 정성들여 만들었으니까. 김원장은 직접 지붕 위에 올라가 진두지휘를 할 정도여서 별명이 ‘왕감독’이다.

민들레집은 국가 보조를 받았지만 학교건물은 87년 김원장이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을 때 탄 상금 1천8백만원으로 시작했다.

“강박사가 설계했을 때 예상경비가 18억5천만원이었는데 16억으로 완공했어요. 정말 실비로 지었지요. 이만한 것을 짓자면 보통 백수십억원을 들인답니다.”

대우그룹 김우중회장은 돈도 없이 무조건 “짓자”고 달려드는 김원장을 보고 “애광원 원장은 간이 커서 돈도 없이 일부터 벌인다”고 했다.

“내가 본래 정박기가 좀 있어요. 정박아들이 그렇거든요. 무엇이든 곧이 곧대로 듣고 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제가 꼭 그래요.”

무슨 일에나 철저한 김원장은 애광원 건물 벽에 못 하나 박을 때도 강박사와 상의를 한다.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죠.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관리하는 게 건물을 살리는 겁니다.”

아직도 애광원의 건축사업은 진행중이다. 김원장이 몇십년 전 손가락만한 대나무를 심었던 뒤 언덕은 지금 키 큰 대나무 숲이 울창한데 이곳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공예 등을 실습할 수 있는 작업장을 세동 지을 작정이다. 저 좋은 대나무 숲을 자르느냐는 질문에 강박사는 웃으며 “왜 자릅니까. 경사면 그대로 살려 지을 겁니다. 비탈이 결코 나쁜 게 아니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이제 애광원은 거제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특히 애광원의 수익사업으로 시작한 애빈하우스라는 이름의 온실찻집은 거제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 찻집에는 택수라는 이름의 애광원 출신 젊은이가 차를 만들어주는데 커피든 차든 주는 대로 마셔야 한다.

“애빈하우스는 일반인들과 지체아들이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어요. 이런 복지 시설은 수용시설이 되어서도 안되고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서도 안됩니다.”

이 찻집은 김원장의 아이디어인데 수익사업으로 양계를 생각했다가 김원장이 독일에 가서 이런 찻집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지체아, 장애인이 최고 대우를 받아야 한다

때로 사람들은 너무나 쾌적한 애광원을 둘러보고 후원을 중단하기도 하고 “이런 애들이 이렇게 대우를 잘 받느냐”고 놀라기도 한다.

“왜 우리 애들이 불편하게 살아야 합니까. 저는 우리 애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어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모두 다요.”

실제로 애광원은 대나무 숲에서 나오는 죽순부터 잡곡밥까지 최고급 무공해 산물만 쓴다. 햄과 소시지 같은 인스턴트 식품 대신 나물 같은 손이 많이 가는 재료를 쓰기 때문에 이곳의 영양사와 조리사들은 품이 많이 든다. 인스턴트, 동물성 중심에서 식물성으로 식단을 바꾸면서 아이들의 살이 빠지고(지체아들은 활동이 부족해 비만해지기 쉽다) 자연식을 해서인지 성격들도 좋아졌다고 한다.

“우리가 연근을 사러 가면 시장 사람들이 그래요. 이 비싼 연근을 그 애들한테 먹일 거냐고요.”

달걀도 무공해 유정란으로 먹이는 김원장이다. 두유도 직접 짜고 두부, 만두도 만들고 거제도산 고급 밀가루로 국수도 뽑고 무공해빵도 직접 만든다. 강박사가 지은 쾌적한 교실에서 아이들은 적성에 따라 음악 도예 바느질 종이접기 염색 목공 도자기 등을 배우고 이곳의 빵공장이나 원예실 등 실습실에서 자연스레 직업교육을 받는다. 물론 모두 자격 있는 특수교육 전공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세심하게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애광원은 쾌적한 환경, 적절한 교육, 인간적이고 건강한 유대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아이들은 무척 밝고 건강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성격들도 무척 좋다고 한다. 이는 애초에 김원장이 꿈꾸었고 강박사가 원하는 그대로이기도 하다. 지금 2백30명이 살고 있는 애광원은 이미 포화상태다.

얼마전부터 강박사는 장승포시 한가운데 주거 공간을 짓고 있다. 애광원 출신들이 이 사회 한가운데에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그룹 홈’ 시설이다.

“김원장님이 받은 호암상 상금으로 시작했습니다. 물론 연립주택을 전세내면 더 싸게 먹히겠지요. 하지만 장애인들이 제대로 지은 건물에서 제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겁니다.”

으레 장애인 시설이나 주거지는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 우리사회는 복지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왜 장애인들이 보통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하는 걸까. 건축가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는 불편해도 능히 참을 수 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대접을 받아야죠. 그리고 어쩌면 이들에게는 이 좁은 공간이 그들 세계의 전부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 최대한 좋은 공간을 만들어주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