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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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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전임목사를 비롯해서 여러 목회자들의 추문이 사회에 회자될때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써본 글입니다.

깊은 신학적인 검토를 거친글이 아니고 스스로의 경험에서 느낀 점들을 적어본 것이므로 많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공감가는 부분만 공감해주시는 정도로 읽어주시고 수정이 필요한부분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죄를 상대하는 법

 

 

요즈음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분들의 성추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사회가 시끄럽다.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쉽게 허물어질까 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우리가 죄와 사람을 보는 눈이 좀 왜곡되어 있어서 그런생각이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죄에 허물어져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 느낀점을 이야기 해본다.

 

 

1. 보이는 순간 눈을 돌려야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고 옥한흠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님이 생전에 한 설교중에,

보지 말아야 할 여자가 눈에 보인다면 “그 순간에 바로 고개를 홱 잡아돌려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죄는 맞딱뜨려서 싸울 대상이 아니라 미리 피해야 하는 대상이다. 보이는 순간에 고개를 돌려야 한다. “째깍” 하는 그 순간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면 죄를 상대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 여자를 한참 쳐다보다가 한숨 한번 크게 쉬고 고개를 돌렸다면 이미 죄에 노출된 상태다. 마음깊은 곳에 죄에 관한 열망이 있고 그것을 용인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참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때가 이미 죄의 상태이고 회개할 타이밍이다.

 

마5:28에 음욕을 품고 여인을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원어상 본능적으로 그냥 쳐다보는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의지적인 욕심을 품고(혹은 유혹의 목적을 가지고) 어느정도 긴 기간을 보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마음에 그런 의지적인 정욕을 품었다면 여건만 마련이 되면 당연히 간음을 하게 된다. 여건이 허락되었고 아니고의 차이지 실행한 죄와 그 질은 똑같다는 것이다.

 

그 마음의 간음을 허용하는 시작이 바로 고개를 돌리지 못한 그 시점이다. 평소에 간음죄에 관한 마음의 상태가 이미 수비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 죄의 마음을 관리할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인데 그게 큰 착각이라는 것이다.

 

 

 

2.정신이(분별력) 있을때 죄의 길로 가는길을 미리 차단해야 한다.

그 목사님들이 죄에 빠진 순간은 여자들과 만나서 절제하지 못한 그 순간이 아니라, 그 몇 년전에 처음 그 여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때 바로 고개를 돌리지 못한 그순간이다.

침대가 있는 집무실에 혼자있을때 여자성도가 들어올수 있게 한 그 순간이다. 아니 집무실에다가 침대를 놓은 시점이다.

이 순간에 이미 죄는 잉태되었고 성추행은 당연한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적으로 이미 교만의 상태, 위선의 상태, 나태함의 상태가 있으면 당장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거나 발전하다가 때가 되면 ‘반드시’ 구체적인 죄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편 1편의

“따르다” “서다” “앉다”라는 말씀은 인간이 죄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주고 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쳐다보고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가 회개할수 있는 때이다. 보였을때 바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이때는 우리 힘으로 회개하기는 힘들다. 하나님께 맞아야 정신차리는 상태다. 맞고라도 정신을 차리면 그게 얼마나 복인가? 드러나게 맞은 그 목사님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복받은 사람들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며--맞아도 정신 못차리는 상태다.

 

눈이 갈 때 회개해야지 발이 갈 때는 우리 힘으로 회개하기는 힘들다.

잠7:8에서 미련한 자는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그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가는 것은 자기집으로 가는 발걸음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죄에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에 음녀에게 홀리고 푸줏간으로 끌려가는 소가 될 수밖에 없다.

큰길에서 음녀의 집이 있는 골목길로 ‘가까이 하여 가는’ 그 발걸음에서 이미 패배가 판가름났다.

 

뇌물줄려는 사람, 유혹하려는 여자가 있는 곳에는 아예 가지 않아야 한다.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죄에 관한 동의와 용인이 이미 한참 전에 있었는데 거기 가서 거부가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애초에 긴장하고 피하는 사람들은 설혹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

만나고 안 만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상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3.하나님의 콘트롤 안에 있어야 한다.

내 의지가 콘트롤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거나 만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얼마전에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음란물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일이 너무 없고 시간이 많이나서 드라마나, 영화좀 다운 받아 볼려고 피투피 싸이트에 들어 갔는데 어느 순간엔가 그걸 보고 있는 것이었다.

부동산 출근하고 나서 처음에 음란물 차단프로그램을 깔려고 했는데 전화와 인터넷이 내 명의로 된게 아닌관계로, 스스로에게 맡기고 절제하기로 했다. 말씀을 읽고 기도도하면서 절제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택도없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순간에 나는 이미 백퍼센트 패배했다.

 

내가 죄와 싸울려고 서있는 그 현장은 이미 죄에 패배한 현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를 콘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의 근본이다.

몇 개월간 하루 내 혼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무실에서 음란물차단 프로그램이 깔려있지 않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그 자체가 죄에 노출된 상태이며, 죄의 상태이다.(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임)

 

그래서 부모가 아이들 음란물 못보게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깔고 비밀번호를 외울 수 없도록 영문이랑 숫자 15자정도 종이에 적어서 기록하고 사무실과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쯤 떨어진 곳에 숨겨두었다.

최소한 30분정도의 시간과 그 거리를 가야하는 수고가 있어야  음란물에 접근 할 수 있게끔 만들고자 한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내가 겪어본 나는 그 음란죄에 대해서는 얘들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수준이었다.

내가 보기에 나뿐 아니라 열댓살에서 칠팔십세 까지 남자라면 나랑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죄뿐만 아니라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죄에 관해서 우리 수준은 얘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안 짓는 척 하는 실력이 좀 늘었을뿐이지.

 

 

자기 스스로 죄를 콘트롤 하는 능력에 관해서는 목회자라고 일반성도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

목회자는 죄에 노출되는 정도가 약하고 하나님의 보호막이 두터울 뿐이지. 이미 죄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라면 목회자든 평신도든 어린 아이든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똑같다.

크게 사역하시던 목사님들이 허물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부분에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은혜받고 구원받아도 스스로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평생 그렇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콘트롤 안에 있는 것(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 옷자락 붙들고 버티는 것, 그걸 평생 붙들고 배우는 것이지 우리가 죄짓지 아니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이 좀 커졌다고 생각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얻어 터져 마땅하다. 그리고 여럿 더 죽이기 전에 빨리 사고터져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빨리 그만두는것이 낫다.

 

옥한흠 목사님이 와도 캘빈이 와도 바울이 와도 안되는 얘기다. 하나님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가능한 인간은 오직 예수 한분 뿐이다.

 

훌륭한 목사님들일수록 스스로를 하나님의 붙드시는 은혜아래 가둔다. (자기 스스로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장치를 자기를 견제하기 위해 허용하고 마련해서 스스로를 죄의 가능성에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뜻)

 

심방다닐때 꼭 사모님 동행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여집사님은 단둘이 절대 만나지도 않는다는 원칙을 정한다.

 

그리고 껄끄럽더라도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인정한다. 견제자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존재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자기를 겸손하게 할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허물어지는 사람들의 스타일을 보면 독선적이고 목표지향적이다. 관계에 관한 배려가 적다. 하나님은 표면적인 옳고 그름이나 양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와 질의 문제에 항상 관심이 있으시다.

 

그리고 회계를 투명하게 한다.(고후 8:20절에 보면 바울은 돈에 관한 문제를 자기가 처리하지 않고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하도록 했다.)

대체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회계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이 관리하더라도 회계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가 죄다. 인간이 양심껏 회계처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맡기는 것 자체가 교만한 죄다.

 

그분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므로 위에 기록한 부분들 외에도 스스로가 아닌 장치로 자기를 콘트롤 할 것들을 많이 둔다.(그 장치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은 예배와 기도라고 할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도 스스로를 믿지 않기에 하루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마음이 크다고 생각한다 .)

 

 

룸싸롱 까지 따라가놓고 “참아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변명의 모습이다. 

여관방에 따라 들어가 놓고 “손만잡고 자려고 했습니다”라며 징징우는게 우리의 모습이다.(예를 들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게 참아지면 인간이 아니지.

애초에 마음자세가 속편하게 죄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도 회개하지 못한 죄때문인 경우가 많다.

지은 죄가 있다면 어떤 죄이든 간에 무조건 예수 이름을 들고 하나님께 나가 용서를 받고 평안를 구해야 한다. 그분이 그렇게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다. 그러나 한가지 죄만은 용서하지 못하신다. 그 한가지 죄는 바로 "회개하지 않는 죄“이다. 회개란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2천년전에 드러내신 하나님의 약속을 깨는 것이므로 스스로 하실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앞에서 심각한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지은 죄를 하나님앞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버티고 있는것이다.)--이 괄호부분은 현재의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은 내가 죄를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붙들어주시는 은혜아래 스스로를 가두어 죄의 영역에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 옷자락 붙들고 사는 것이다.

“내가 좀 거룩해지고 성결해지고 죄를 이길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라는 착각을 죽을때까지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죄는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니라, 쳐다보지 말아야하고 근처에 가지 말아야 할 상대이다.

@from=sinrock71&rcpt=sinrock71%40daum.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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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형진 2014.10.13 08:11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예수님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살게 되면서 죄와 멀어지고 육신의 성품들에서 멀어져 점점 더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성화의 과정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며, 성화의 열매들은 점점 자라고 무르익을수 있습니다.
    다만, 신앙생활 오래간 열심히 한다고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커진다는 착각을 하지 말자는 뜻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표현력으로 어려운 주제에 대한 생각들을 적다보니 혹 오해의 소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죄가 있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연약한 사람으로서 실패했던 경험을 토대로 실천적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