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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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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스러운 간증.

 

 

예수믿기전 20-30대때는 맥주 몇잔 걸쳤을때, 그리고 피부에 스치는 바람이 문득 차가워졌을때, 느낌들을 짧은 글로 적어보곤 했다.

스스로 촌스럽다는 제목을 단것은

자기가 쓴 글에 자기가 해설을 붙이는 게 그렇고, 또 ‘꽃’이라는 소재가 계속 등장하는 초딩같은 취향 때문이다.

근데 예전에는 세련된 것들이 좋았는데 이제 촌스런 것도 다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누가 뭐라 그러건 말건 부족한 글들을 표현하고 게시해보는 배짱도 생긴거 같다.

 

당시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에 쓴 글들, 특히 그 감정을 침 뱉듯이 뱉어 놓은 "시"가 아닐까? 그것들의 흐름을 보다 보면 내가 하나님께로 나온 흔적,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흔적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젊은 날 예수 믿기 전에 끄적이던 글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오래전 글들이라 지금보니 유치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문학적 수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기록이라고 생각하니 부족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많이 줄어든다.

리듬이나 감성이 너무 약해서 시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냥 낙서라고 말하는 게 좋을거 같기도 하다.

 

 

"목련"

 

숨이 막히게 하얗다

 

노름하다가

다 털리고 오줌 누러 갈 땐

대마초 연기같다.

 

4월 하늘 끝없이 파란 거짓말 아래,

잠시 하얀 거짓말.

 

믿어 줘야지.

 

비오는 날

어긋난 보드 블럭 위에 밟힌

모습이 섹시했다만,

 

하얀걸로 믿어줘야지.

 

 

 

"아카시아"

 

오후볕에 나른한 너의 머리칼에 흐르는 향기에

미지근한 발정이 났었다고.

 

온종일 끈적이는 낙서를 끄적이고 있다.

 

맛도 없는 것이

향기만 좋아 가지고

한 입에 뜯어 먹고픈 나로선 얼마나 손해인지

 

단물 쪽쪽 빨아먹고

심심한 오후

허전해서 미치겠다.

 

 

 

20대 때 쓴글들이다. 술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던 시절이다. 전혀 근거 없이 30대에는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살던 때.

온통 관심이 찰나적인 것에 있었다.

인생이 "잠시 하얗게 피었다가 지는 목련처럼"허무한 것과 , "은근한 향기로 다가오지만 조금만 더 그 선을 넘으려고 하면, 이미 단물 다 빠진 껌처럼 누추해지는 쾌락" 그걸로 허전함을 채우려는 것이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라는 것을 그때도 느끼긴 했나부다. 그런데 전혀 인정하지는 않는 삶을 살았다.

그때는 그런걸 멋있게 생각했다. 한 달치 월급을 노름판에서 한방에 질러버리는 담대함.

멋있게 살다가 깔끔하게 가야지라는 말을 자주했다. '내일을 향해 쏴라' 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폴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총을 들고 뛰쳐나가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맥주"

 

나는 회색분자다.

 

까만 답답함과 하얀 지루함 보다는 낫다.

흑곰하고 한판 싸우다 몇 대 터지고 뒤지고 싶은 욕망이 보글보글 끓어도.

 

독한거 보다는

싱거운게 중독이 심하지

 

현찰 1,2만원 처럼

옆집 어중간한 머스마하고 바람나는거처럼

입술에 거품 묻히고.

미지근해지면서,

 

 

"나비"

 

1초의 궤적도 종잡을 수 없는 비행.

 

어디서부터 어디를 지나 여기까지 왔을까?

 

무덤가 진달래꽃 위를 심심하게 나는 나비.

 

우연히 시선이 머문 자리에

 

팔랑거리는 나비.

 

 

 

30대 초반에 쓴 글들이다. 인생에 답이 없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끼던 시절이다. 답이 없다보니 선한것은 타협밖에 없었다. "입술에 거품을 묻히고 미지근 하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사람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발견하던 시절이다.

술 먹은 다음날 아침 숙취에 시달릴 때는 말할 수 없는 우울감을 느꼈다.

흑곰하고 싸우는 모습은 "가을의 전설"이라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브래트피트가 곰과 싸우는 모습에 대한 동경이다. 얼마나 싸워볼만한 가치가 있는것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흑곰하고 싸우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다 들었을까?

그야말로 인생은 "무덤가 진달래꽃 위를 심심하게 나는 나비"였다.

 

 

"늦가을아침 거울을 보며".

 

날카로운 세숫물

차가운 스킨로션

 

이빨 스케일링 한지가 3년이 다되 가는군

나름대로 쭈그러진 서른네살.

 

속쓰려도 인상쓰지 말고

대충 담배 하나 물고 비시시 웃기로 했다.

 

살갗에 스치는,

가을바람같은 글을 한줄 남기고 싶다.

 

 

 

"장미"

 

빨간 것들이 좀 그렇다.

 

지지고 싶어 달아오른 담뱃불.

비오는 날 미친년이 달고 나온 머리핀.

견디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다.

 

거짓말을 할래면 좀 더 새빨갛게 해야지,

 

잠시라도 피가 들뜨고

몇 숨에 담배 한개피가 다 탈수 있게

 

네 눈가에 세월의 마스카라 자국이 빗물에 거무스레한 장미 이파리처럼 번질 때가 되더라도.

빨개지다가 빨개지다가 검어 졌다고......,

 

바늘한땀에도 어김없이 새어 나오는 핏물처럼,

결코 견디지 못할것들이 있더라고......,

 

 

 

예수 믿기 얼마전에 쓴 글들이다.

여전히 찰나적인 것들만 보고 있다. "살갗에 스치는 가을바람같은 글 한줄." 인생의 의미는 그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짧은 순간의 맛. 담배를 엄청 좋아했다.

인생은 "나름대로 쭈그러져" 가는 것이다.

돈 떨어지고 힘이 빠져야 조금이라도 자기를 돌아보는게 인간인거 같다. 그 와중에도 "속쓰려도 인상쓰지 말고 담배하나 물고 비시시 웃으려는" 시건방지기 이를데 없는 똥폼은 유지하고 있다.

이게 몇달 있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부서지기 시작한다. 그야 말로 내가 '쌔까말 때' 주님이 찾아오셨다.

예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때 쓴 글인데 이상하게 기독교 적인 냄새가 난다. "바늘한땀에도 어김없이 새어 나오는 핏물처럼, 결코 견디지 못할 것들" 이란 표현은 죄가 뭔지도 모를땐데 어쩜 그렇게 죄스럽게 표현했는지......,

 

 

내가 예수를 전혀 모르던 때부터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과 인도하시는 손길이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계속해서 거짓말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왜 그랬을까를 지금은 좀 알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숙취와 담배연기에 묻어서 나오던 그 거짓말이라고 외치던 절규의 이유를......,

그건 정말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찰나의 멋과 순간의 쾌락에 집중하라는 그 음흉한 놈의 거짓말.

영원할것 같은 이세상은 거짓말이다. 때가 되면 종이처럼 말려서 사라질 거짓말.

인생은 더 심각한 거짓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길가다가 차에 박혀서, 아니면 나도 모르게 속에서 자라는 암덩어리가 발견되어서. 그렇게 잠시 숨 한번 돌릴틈에 실체가 드러날 거짓말이다.

잠깐 피었다가 지는 꽃들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거지 싶다.

 

 

 

2004년 초겨울쯤 경제적인 난관에 부딪혔다. 카드빚 등 당장 갚아야할 돈이 2-3000만원 쯤 됬는데 (나머지는 더 많았다) 내 수중에는 만원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더 이상 빌릴데도 없었다. 당장에 내일 내야할 밀린 임대로,카드빚,전기세, 전화세,......, 생각하다가 힘이 빠졌다.

새벽두시쯤 갑자기 어릴때 빵얻어 먹으러 가던 시골 동네교회 건물이 생각이 났다. 왜 그랬을까? 갑자기 기도를 했다. 하나님 100만원만 주십시요 그러면 교회를 다니겠습니다.(염치는 있어서 다음날 메꿔야할 정도만 달라고 했다. 조금 더 달라고 하면 안 줄거 같아서) 그러다가 잠들었는데, 그 다음날 잠에서 깨기도 전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딱 그 말 한마디가 들려왔다 "100만원 입금했다."

통장에서 돈 빠져나갈까봐 달려서 현금지급기로 갔다. 그때 달려가면서 신기하다는 생각을했다.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돈을 찾고 전기세, 전화세등 급한거만 내고, 그날 저녁에 그돈 가지고 오락실 가서 노름을 했다. 인간수준이 그 정도였다. 하나님께 한 교회가겠다는 약속은 싸악 잊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돈이 또 다 떨어져서 한번더 기도를 했다. 딱 100만원만 구했다. 염치가 없어서. 다음날에 수수료 딱 100만원 짜리 계약이 써졌고, 그 다음날에 입금이 됬다. 또한 번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그냥 저냥 사무실이 좀 돌아갔다. 싸악 잊고 지내다가, 6개월 후쯤 정말로 숨쉬기 힘든 코너에 몰려서 교회를 찾았다. 전에 다니던 교회 2층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후 6년여간의 여러가지 사건들 생략----

그거 다 적으면 책한권으로도 모자란다.

짧게 써보면 이정도다.

 

 

하나님께 많이 맞았다.

하나님은 같이 살면서 조금씩 가르치는 분이셨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양다리 걸치는 걸 그냥 두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분명하고 섬세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게 겪고도 나는 흔들리고 눈 돌리고 그랬다.

예수 믿고 나서 부터 전혀 '시'라는 형태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전에 한번 적어 봤다.

 

 

"사랑"

 

사랑은 벚꽃핀 길을 함께 걸어가는 꿈을 꾸는 것이다.

 

어정쩡하고, 부끄럽고, 아픈곳에 서서.

빨리 이불을 뒤집어 쓸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달콤하다가

너저분한 긴 세월을 품고 닦아 주는 것이다.

보내고는 살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아파하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조금씩 표정짓기가 쉬워지는것 같다.

 

쿨하게 돌아서는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은, 지친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리듬이 딱딱하고, 감성적인 맛이 없는건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조금은 힘이 빠진거 같기도 하다.

마음대로, 혈기대로 살다가 예수님 땜에 마지못해 성질 죽이기가 만만치는 않았나 보다.

너무 답이 안 나오고, 답답하고, 화가나고 할때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기도 하고 그랬다.

 

40여년을 살면서 한 짓이 쿨하게 돌아서는 것 밖에 없었다. 불편하면 돌아서 주는게 좋은건줄 알았다.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었다.

사람은 원래 아픈것이고, 그걸 품는게 사랑이었다.

오래간 서있는 것이었다.

사랑은 잘 만들어진 것을 만나는게 아니라, 모난것에 찔리고 베이면서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십자가 만큼 쿨하지 못한 것도 없다.

그분이 왜 거기에 못 박히면서 가만히 있었을까?

나는 사랑을 모르고 살았다.

내가 살아온 흔적은, 굽이 굽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짝사랑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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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예전 교회 다닐때 적어본 간증글이다. 이글을 적은지도 벌써 어언 3년여가 지난거 같다.

작년 가을에 촌스럽게도 또 꽃 하나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코스모스”

 

 

늦은볕 아래

하늘거리는

풀같이 여리고

물같이 연한 몸짓

 

마음이 식지는 않았어!

끓어오르던 고백에 숨이 차서,

좀 가누고 웃어주는 습관이 배었을 뿐.......,

 

지조가 없어서 흔들렸던게 아니야!

바람이 많이 불고 있었어.

 

여전히 설레이던 네 눈빛을 기억해.

  • ?
    백형진 2015.03.16 13:03
    아래에 게시해 주신 나태주 시인의 글처럼, 짧고 담백하지만 강하게 마음을 때리는 글이 참부럽습니다.

    구구절절히 긴 설명이 붙은 글들이 초라해 보이지만,
    뭐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인 걸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