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의 역설

by 권대원 posted Jan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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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청부 9진6팀의 권대원 형제입니다. 저는 전임목사 면직운동을 몇 년 째 계속 하고 있고, 지금도 '치유와 공의를 위한 TF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까지 평양노회에서 주관한 전임목사의 권징과 관련된 노회재판 준비 땜에 많이 바빴습니다. 재판결과는 2월3일(수)에 합동교단 신문인 '기독신문'에 발표된다는군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도 아니고 몇 년째 이런 부정적이고 수치스러운 이슈에 집중하며 일하다보니 개인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하고 화가 날때도 많이 있네요. 특히 이번에 노회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홍**교회와 전임목사 측의 노골적인 거짓말과 뻔뻔함을 재판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기도 하고 그들의 교회에서 발표하는 성명서를 읽으면서 어이가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한 개인의 도덕적 일탈의 문제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유사 사례들이 한국교회에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데서 그 문제의 심각성을 볼 수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문직 성범죄자중 1위의 직업군이 '성직자'였으니까요.


이번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느낀 점이 많았는데 특히 이 문제를 성범죄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의 목회철학에서부터 그 문제를 짚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2014년 10월에 '교회2.0 목회자 포럼'에서 이 주제로 제가 발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원고를 옮겨봅니다. 교회가 사이즈가 커지고 대형화 될 수록 '한 교인의 소중함'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 글이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을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발제의 주제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니 글의 주된 내용은 목회자들에 대한 내용이지만, 사실 이 문제는 목사님들 뿐 아니라 실제적 목회를 담당하는 간사,리더, 목자 등 모든 교인들이 성찰하고 되새겨봐야할 내용이라고 봅니다. 

원문 링크: 
http://ppss.kr/archives/32776


교인을 위하는 목사, 교회를 위하는 목사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한복음 10:11,12] 


1. 교회를 위하는 것이 교인을 위하는 것이다?

이 땅의 교회에는 눈에 보이는 제도로서의 ‘가시적 교회’와 눈에 보이진 않지만 구원받은 참된 성도들의 ‘비가시적 교회’와의 긴장과 불일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현실 속에서 부딪히는 목사들은 ‘가시적 교회’의 성장과 성공에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교회의 성장과 번영에 헌신하는 것이 곧 ‘교인들의 축복의 통로’라고 현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 현실 속에서 결핍과 고통가운데 있는 약자로서의 교인, 사회적 경쟁시스템의 낙오자로서의 교인들이 설 곳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조차 자신들의 ‘가시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잘나고, 돈잘벌고, 성공하고, 똑똑한’ 교인들을 편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편애시스템이 경쟁구도에 도움이 되고 교회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반복해서 가르쳤던 목사가 삼일교회의 전임목사인 전** 목사였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편애와 차별을 일삼았으며, 그 편애와 차별은 ‘성도 수를 급속하게 불리는데 기여하는 부목사’,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사람’, ’성공한 기업가’, ’부흥한 진장과 간사’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해서 차별하며 칭찬을 하거나 모욕감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삼일교회 안에서 이런 노골적인 공개적 경쟁시스템은 많은 헌신된 교인들의 이탈을 가져왔고, 간사와 리더들은 교회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직장생활까지 피해를 받으며 가혹하게 쓰임받다가 직분을 내려놓으면 아무런 케어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상황이 삼일교회의 일상적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임목사의 성범죄 문제가 불거지기 이전 벌써 삼일교회는 내부적으로 헌신하는 리더들의 붕괴와 이탈이 있었습니다.

 

2. 교인을 위하는 목사와 교회를 위하는 목사는 어떤 점이 다른가?

교인들이 대개 순하고 착해서 직접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교인들은 누구보다 교인을 대하는 목사가 ‘교회의 이익’ (결국 교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자신의 권력과 명예의 상승으로 귀결되는 이익)에 예민한 사람인지‘교인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조금만 겪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인들끼리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목사님들만 알 수 없는 이야기죠. 당시 삼일교회 부교역자였던 어떤 분은 뭔가에 홀린 것 같이 과열된 경쟁이 만연한 삼일교회의 분위기를 조용히 거스르며 철저히 간사들의 편에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해주며 간사, 리더들을 개인적으로 자주 만나고 케어해줘서 청년들의 신망과 존경이 두터웠던 분도 있었습니다. 흔치 않은 사례였지만요.

교인을 위하는 목사와 교회를 위하는 목사가 일치하면 가장 좋겠지만 목회현장에서 부딪히는 교인들은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몇가지의 행동들이 보여주는 일관된 스펙트럼을 통해 그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아주 선명하게 구분되어 나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섞여있는 모습이지만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두고 있는지에 따라 교인들은 그 목사가 ‘교인을 위하는 목사’인지 ‘교회를 위하는 목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몇 가지 예로 적어놓은 행동의 지표가 있습니다. 아래에 기술한 사소해 보이는 행동과 가치관들이 반복해서 겹치는 경우, 교회를 위하는 목사인지 교인을 위하는 목사인지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 비교를 위해 두개의 대조되는 문항을 붙여 놨습니다.

1) 교인의 신앙성장과 현실 속 실제 삶의 형편에 관심이 많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2) 교회프로그램에 얼마나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많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3) 전화나 심방을 자주 한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4) 교회행정적인 일 위에는 사적인 연락이 거의 없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5) 자기가 맡고 있는 소모임의 교제, 회원들의 대소사, 신상의 변화에 관심이 많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6) 자기가 맡고 있는 소모임의 규모, 출석률, 행사에서의 참석율에 관심이 많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7) 공동체에서 가장 약하고, 모나고,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에게 관심이 많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8) 공동체에서 가장 잘나가고, 돈 많이 벌고, 유명한 사람들만 심방다니고 연락한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9) 교인들과 친구처럼, 선후배처럼 격의없이 지내는 것을 지향한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10) 교인들과 분리되어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고 베일속에 감춘 사생활로 신비의 영역을 지향한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11) 교인들의 평소 삶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한지 깊은 관심으로 이해하려 하며 상대적으로 교회 프로그램을 덜 만드는 목사 – 교인을 위하는 목사

12) 교회일에 헌신적이지 않다고 닦달하며 교회중심적인 시각으로 교인들의 일상의 삶의 분주함과 무게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프로그램만 잔뜩 만들어내는 목사 -교회를 위하는 목사

13) 외부집회와 외부강연을 통해 수백, 수천명을 만나는 기회보다 교회안에서 열명도 안되는 교인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14) 외부집회와 외부강연을 통해 수백, 수천명을 만나는 기회만을 선호하며 숫자가 적은 모임은 섬기려 하지 않는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15) 교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기독교적 대답에 관심이 많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16) 교인의 사회참여를 반대하고, 오직 교회일에만 헌신할 것을 독려한다. 사회적 이슈엔 관심이 없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17) 교회안의 일도 상식적으로 처리해야 하고 충분히 투명하고 소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 교인을 위하는 목사

18) 교회안의 일은 교회논리에 따라야 하며, 패쇄적이어야 하고 상명하복의 순종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교회를 위하는 목사

이 외에도 많은 예들이 있으나 위에 열거한 예들이 2,3개 이상 겹치는 목사들의 패턴을 통해 그 목사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교인들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교인을 위하는 목사는 ‘숫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성도 개개인의 삶의 정황, 신앙생활의 질]에 관심이 많은가 하면, 교회를 위하는 목사는 ‘개별 성도의 삶보다는 단체로서의 규모, 교회 프로그램과 행정에서의 참석율과 출석율’ 등 ‘숫자로 표현가능한’ [가시적 성과]에 가장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김현봉(1884~1965) 목사: 교인을 위하는 목사는 이런 분이 아닐까?
※김현봉(1884~1965) 목사: 교인을 위하는 목사는 이런 분이 아닐까?

<멋진 교회 대신 가난한 교인 집 마련>

3. 진정한 목회적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역현장에서 일반 교인들과 목회자들과의 가장 큰 관점의 차이는 목회자들은 교회생활을 바람직한 인간 삶의 전부이자, 직장의 전부, 사역의 전부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를 벗어난 성도의 삶과 그 현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목회자가 ‘한 명의 교인을 위한다’는 것이 그럴듯한 관념적 카타르시스로 끝나지 않으려면, 철저하게 양육하는 ‘성도의 삶의 수준’이 ‘목회적 성공의 기준’이라는 생각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교회의 교인 수가 얼마나 불었는지가 목회의 성공이 아니라, 아무리 적은 수의 교인이라도 그가 주일이 아닌 일상의 순간에, 교회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기독교인답게’ 살고 있는지가 목회적 성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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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성장학의 대부 로버트 슐러 목사의 수정교회. 화려함과 그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수정교회는 슐러 목사의 은퇴 후 자녀들 간의 교회 지도권을 둘러싼 다툼과 이로 인한 교인 수 감소, 재정 악화로 인해 결국 2010년 파산, 가톨릭 교회에 팔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가 맡고 있는 부서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목회적 성공이라고 착각합니다. 결국 자기가 맡은 부서의 성공은 곧 자기 ‘영성과 실력의 증명’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욱 더 커다란 대형교회나 주류 부서의 사역을 맡으려 합니다. 실제로 삼일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주일학교나 타부서를 맡다가 삼일교회의 핵심사역부서라 여겨지는 ‘대학청년부’를 맡게되면 마치 ‘주류 부서로 영전한 듯한’ 축하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한 명의 교인, 한 명의 영혼에 집중하는 목사라면 그 교인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하고 성숙하는지가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충분한 사역기간을 주지 않고 매년 ‘뺑뺑이 돌리기’ 하는 식으로 교회 전담부서를 옮기곤 하는 것도 순전히 교회의 행정편의주의적 발상같습니다.

한 명의 영혼을 알아가고 성숙시키고 멘토링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전혀 배려하지 않은 교회의 제도중심적인 발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수년동안 같은 멘토 아래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대학생 선교단체에서의 경험은 교회제도안에서도 어떤 식의 목회와 멘토링이 바람직한지 생각해볼 만한 단서를 줍니다.

한 명의 영혼을 깊이 멘토링하고 양육하기 위해선 교회의 양육 프로그램에 사려깊은 배려와 철학이 녹아들어가야하는데 현실에선 너무나 행정적이고 교회 제도 중심적인 프로그램들로 인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4. 아흔 아홉 마리 양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의 역설

예수님은 마태복음18장에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두고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마태복음 18:12,13]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한 마리의 양의 비유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면, 목회자의 목회는 다수의 안락함을 다소 위험에 빠드릴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 안락함에 안주하기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모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험은 한 마리의 양때문에 아흔 아홉 마리의 양도 위험에 빠뜨려 버릴 수 있기에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모험이죠.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두가지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양을 ‘수익의 대상’으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가치’로 바라볼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양들을 수익의 대상으로 여기는 목자였다면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중에 버려두고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 바보같은 행동입니다. 차라리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더라도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지키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이 맞는 행동이죠.

그러나 만일 양들을 수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한 마리, 한 마리 양을 ‘생명의 가치’로 귀하게 여기고 ‘양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자였다면 어떨까요? 그런 목자라고 가정을 해보면 그제서야 저 비유 속에 나오는 목자의 행동이 이해가 됩니다.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목자라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나 ‘한 마리’의 양이나 그 가치가 ‘정량적’으로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둘 다 귀하고 소중하겠죠.

또한 그렇게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목자는 한마리 양을 각각 개별적으로 전부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합리성과 가치에 대한 계산’을 초월하는 행동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에서만 비롯됩니다.

※양을 사랑하는 목자
※양을 사랑하는 목자



두번째로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모르는 목자는 ‘목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목회자에게 성도의 존재가 개별적 인격으로 다가오지 않고, 숫자로 다가오는 순간 목회자의 변질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건 그 시점을 교인들도 알아차리게 되죠.

개교인의 인격성이 사라진 거대한 숫자의 개념으로 교인들을 대하는 목회자가 되는 순간, 아흔 아홉마리의 양떼를 위해 한마리쯤은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합리적인 목회자’가 되는 겁니다. 어느새 양 떼들의 숫자가 자기 수익의 원천이자 자기 권력의 기반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렇게 ‘교회를 위하는 목회자’로 변질되는 것을 교인들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아흔 아홉 마리’ 양 떼들 속에 속해있다고 느끼는 교인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그런 목회자에게 더욱 더 편안함을 느끼며 좋아합니다. 그러는 사이 교회는 재산, 학벌, 직장, 배움의 정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특정 계층만을 더 끌어모으게 됩니다.

그리고 ‘잘나가는’ 양떼 아흔 아홉 마리 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그 교회는 목회자도 편안함을 느끼고, 양들도 편안함을 느끼는 교회죠.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까지 불안에 떨며 모험을 할 필요가 없는 ‘그들만의 안락한 게토’가 되어가는 겁니다. 그깟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요? 잃어버리면 돈주고 더 좋은 양으로 사면 되죠.


※ 저 양들의 가치를 다 돈으로 환산하면 부자…?
※ 저 양들의 가치를 다 돈으로 환산하면 부자…?




5. 한 마리 양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목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는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요한복음 10:11]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된 목자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으며 교회를 정하지 못해 ‘가나안 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목자가 꼭 목회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기독교인들이 누군가에게는 의지할만하고 그를 인도할 목양의 책임이 있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목사다운 목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랑 친한 교회 후배는 개신교 목사들의 거듭되는 비리와 부패에 진저리치며 이렇게 탄식하더군요.

‘그깟 설교 못해도 좋다. 신학지식 모르면 내가 공부하면 된다. 그러나 내가 존경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인격만이라도 갖고 있는 목사님을 만나고 싶다’

성도들이 목사님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리 거창하거나 높은 수준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고,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높고 높은 강대상 위에 있는’ 목회자가 아니라 교인들을 묵묵히 사랑하고, 교인들의 삶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항상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성도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온’ 목사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 어렵고 무리한 요구인가요?

한국교회의 타락과 변질에 목회자의 자질 문제 만큼이나 교인들의 맹목적인 신앙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미숙할수록 그 미숙하고 어린 교인들 한명 한명을 위해 죽을 수 있고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목회자의 역할 또한 크고도 지대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이 곧 ‘교회의 부흥’, 즉 양적팽창이라고 선동하던 한국교회의 끝이 어떠한지 우리는 현재 그 비참한 말로를 참담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회복’은 어쩌면 교인수의 폭발적인 증가에 따른 ‘교세확장’이 아니라, 한 명의 ‘못나고 어리석은 교인’을 위해 죽어간 목자(목사)의 피가 흐르는 교인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 명의 교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목자…그로부터 ‘겨자씨같은 진짜 하나님 나라’가 다시 조용히 퍼져나갈 것이라 꿈꿔 봅니다. 2,000년 전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한 목자의 죽음이 그러했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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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교회2.0목회자운동’ 10월 정기포럼에서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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