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에 관해서.

by 백형진 posted May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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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느낀 부분에 대해서 사적인 의견을 적어보는 것이므로 많은 분들과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35세 이전까지는 세상에서 속 편하게 할 짓 다 하면서 살다가,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만나(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고 지금은 믿습니다만) 질질 끌리다 시피 하나님께 나온 사람입니다.  살려달라고 싹싹 빌며 지낸 세월이 이제 어언 10여년이 되어 가네요ㅎㅎㅎㅎㅎㅎ

그렇게 세상에서 속 편하게 살다가 교회를 나오게 되어서 그런지,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면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읽은 말씀들을 기반으로 엮어서 글로 써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래의 주제입니다.

신학적인 검토를 깊이 거치거나 권위가 있는 글도 아니므로 너무 무겁게 읽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르지 못한부분은 지적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별 내용도 없는것이 너무 깁니다. 관심없는 주제이다 싶으시면 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비판에 관해서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 처음에 교회에서 몇가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하나가 “비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여지껏 세상에서는 건전한 비판이 없이는 나쁜것들이 개선되지 않으므로 비판은 꼭 필요하다고 배웠고, 비판의식을 가지라고 독려하는 가르침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는 마태복음7장의 말씀, 로마서14:1의 말씀에 대해 의문을 가진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 말씀을 비리나 추문에 연루된 기독교인들이 자기가 비판듣기 싫을때 종종 사용하는 경우를 보고 화가 치밀 때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간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말씀에 비춰진 나를 만날수록 그 어떤 비판받을 사람보다도 내가 낫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로 마7:3의 말씀처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들보가 내 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의 피로 용서받은 내 입장, 그리고 내 죄된 근본과 습관을 알고나니, 도저히 남을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이후의 나의 교회생활은 아무리 잘못되고 불합리해 보이는 일에 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 기도만하고 그냥 입 다물고 참았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자세도 이런것 같았다.

 

 

그러다가 보니 간단하게 말 한마디만 하면 오해없이 개선되고 좋아질 수 있는 일인데도 말한마디를 못해서 별 것 아닌 문제가 나중에 가서 더 일이 커지고 곪아터져서 관계가 심각해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교회내에서도 이런 경우를 많이 봤다. 의도적인 악의를 가진 사람들,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아병적인 기질을 가진 부주의한 사람들이 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릴때도 누구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아서 세상의 모임이나 어린 아이들 모임에서도 보기 힘든 혼란스러운 무질서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종종 보았다.

하나님께 맡기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 무질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본적이 없었다. 결국 곪아터져서 사고가 나고 그때서야 허둥지둥 수습하는 것이 내가 본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에 아무리 비판 안하는 것도 좋지만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주로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를 말하고, 또 매체에서 접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 우리 교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어느 정도 기간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새롭게 안 것들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비판이라는 말을 악의를 가졌건 사랑의 마음으로 충고를 하건 크게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하는데,

성경에서는 당사자에게 듣기 싫은 쓴 소리로 들릴 것은 똑같지만 그 말하는 사람의 자세와 목적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취급되는 용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권고, 권면, 책망, 경고, 이런 단어들이었다.

듣는 사람이 듣기 싫은 소리 한다고 다 비판이 아니었다. 성경은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 구성원에게 기도할 책임을 부여하고, 그 질서를 파괴하는 자에게 권고할 의무와 분리를 위해 노력할 의무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마7장의 말씀은 비판하는 자의 자격과 자세에 관한 것이지 인간이 절대적으로 싫은 소리를 듣지 말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교회에는 남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는 것은 모두가 비판이라고 하는 분위기가 깔려 있는 것 같다.(물론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를 볼때 거의가 비판이 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안하면서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줄 줄 알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악의적인 쓴소리인 비판과, 성경에서 용인된 쓴소리인 권고, 권면, 책망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1.비판과 권고(책망)의 개략적인 차이.

비판과 권고(책망)는 듣는 상대방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점, 그리고 듣는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래서 그 차이를 분별해 보자면 그것을 하는 사람의 동기나 마음의 상태로 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비판은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것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와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 관해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을 말 한다.

미움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목적을 가지고, 또는 그 목적이 없더라도 부주의로 인해 상처를 줄 수 있는 교만한 상태와 자세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비판과 권고의 차이는 말하는 사람의 지식도 아니고 외형적인 권위의 유무도 아닌 비판하는자의 마음의 자세에서 갈라진다. 그 동기와 마음의 자세는 본인과 하나님은 분명히 안다.

모든 듣기 싫은 말을 다 비판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성경에서 권고와 책망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과 또 분별하고 책망하라고 하신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 듣기싫은 소리에 대해서 그것을 하는자는 어떻게 해야 하고, 그것을 듣는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2.듣기 싫은 소리를 듣는 사람의 자세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할 때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비판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외식이 많고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마7장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롬14:1과 함께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용이다. 그 말씀은 비판하는 자를 대상으로 자격이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이지 비판 받는자가 수비에 활용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책망받는 자의 자세에 대해 잠언서와(잠12:15, 잠13:18,잠15:32,잠29:1 등등 20여구절이 넘는다) 서신서에 풍부하게 기록해 놓았다. 겸손하게 듣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말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두 다 비판해서는 안될 자이며 또 모두다 책망받을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잠9:8은 거만한자를 책망하지 말고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고 말한다. 지혜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고 말한다. 이는 지혜있는 자는 책망을 들을 줄 알고 교훈을 받아들일 줄 안다는 것이다. 또 책망을 들을 줄 모르는 자는 거만한자라는 말이 된다.

책망을 듣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보면 그 책망이 정말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인지 아니면 무시해도 되는 말인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것이다.

 

 

쓸데없는 악의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상대하기 보다는 무시하고 피하는 것이 낫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경우 그 비판하는 사람 본인 자체가 교만하기 때문에 내가 역으로 하는 말을 듣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잠9:7에는 오히려 능욕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부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때가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고 나는 믿는다. 이하에서 말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주관하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친후에 나오는 권고나 책망은 분명히 듣는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

 

 

지혜자의 자질은 듣는마음에 있다.

 

 

듣기 싫은 소리라도 일단 들어보고 시간을 가지고 생각한 다음에 무시할것, 수용할것, 골라낼것을 생각해야지. 듣고 무조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적용하는 사람들은 이미 지혜자의 수준이 아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마7장의 말씀을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인용했거나, 인용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내가 이미 교만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잠언은 받아들이거나 상대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내 반응이 좀 다르기 때문이다.

 

 

 

 

3.듣기싫은 소리를 하는사람의 자세.

위의 1.개략적인 차이에서 말했듯이 비판과 권고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것을 하는 사람의 동기와 마음의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말을 하고자 하는 동기와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살펴야 한다.

 

상대방(사람이든 공동체든)의 변화를 위한 진심과 그를 위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말이 꼭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부주의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조심성은 있는지, 등 점검할 필요가 있는 사항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1).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바탕을 두었는가?

비판은 내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권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고를 하려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

권고는 우리 모두 틀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뜻이 이러할 것입니다” 라고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세를 낮출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절대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단(롬2:1, 롬3:9-18)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듣는 사람에게 수긍을 받아낼 수 없을 것이며. “너나 똑바로 해라”라는 대답에 대응할 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2).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나 비판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가? 그 비판이 맞다 하더라도 그 말을 듣고 행복하던가.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비판은 아무리 그 말이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행복하게도 하지 못하고 덕이 되지도 않으며 은혜를 끼치지도 못한다.

 

솔직히 맞는 말일수록 더 기분 나쁘고 더 화가 치미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것 같다. 틀린 소리라면 그냥 무시라도 할텐데, 옳은 소리니까 아픈거다. “너는 좀 낫냐?”라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3).그 사람의 변화를 위한 진실한 마음. 사랑의 마음.

비판하는 사람은  스스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대체로 자기의 감정을 풀기위해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권고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고의 말을 전할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 지적하고자 하는 내용만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이 실려서는 안된다.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 미운마음, 등이 섞여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그 싫은 소리를 하면 내용보다 이 감정이 먼저 전달된다.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더라도 이 감정이 실리면 그 말은 그냥 비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의 변화를 위한 마음보다 나의 화풀이가 우선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기본적인 상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죄에 물들어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피를 덮고 오래간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성에서 비롯되는 미운감정, 무시하는 감정을 뽑아내고 권고해야 듣는자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다.

 

 

4).권고에 앞서 깊고 집중적인 기도를 해야한다.

참된 권고자는 스스로도 근본적으로 의롭지 못하다는 기본을 깔고 아주 조심스럽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한참을 고민한 후 진정으로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에 권고를 한다.

그래서 한마디 권고를 하기 위해 최소 일주일 길게는 몇년을 기도하기도 한다. 잘못된 말한마디가 얼마나 듣는 사람의 인생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도하다가 보면 권고하고 지적하고자 했던 생각들 중에 10중에 9는,

나의 좁은 마음 때문에 생긴것, 또는 내가 나서서 말한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닌것,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 해결될 것, 그리고 많은 부분은 그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는 일. 등등 이다. 꼭 해야 하는 말은 10분의 1(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작은 비율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어림해본 수치입니다.)정도이다.

 

 

이과정에서 오래 기도해본 사람은 듣는 그가 마음 아플것을 알면서 그 말을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된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게된다 “하나님 이 말을 제가 안하면 안되겠습니까. 안하고 해결날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그 책망의 절차가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집중적인 기도가 필요한 절차인지를 알기 때문에 솔직히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또 어떤 지적을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고집과 기도부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행위가 된다면, 일반적인 다른 잘못의 경우보다 하나님의 질책의 강도가 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야고보 기자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줄 알라고 말씀하셨다(약3:1)

 

하나님은 다른것은 몰라도 ‘자기의로움’에 빠져 있는 자기자식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한 조치를 취하시는 경향이 있으시다.

 

하나님께 맞아본 사람은 안다. 조심 또 조심해야 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을 위해 책망을 할 수 있다.

 

 

5).반드시 권고를(책망)해야 하는 때도 있다.

위에서 말한 10분의 1 중에서 어떤 경우는 말하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하라고 밀어붙이시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진리에 관련된 중요한 일들일 경우, 그리고 영혼구원에 관련된 긴박한 일인 경우,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교란이나 심한 부주의에서 나오는 질서교란 등이 그런것 같다.

 

진리에 관련된 영적인 공격. 우리의 믿음의 기반에 흠집을 내거나 영성을 무디게 하고자 하는 혼합주의의 공격 등에는 혹여 실수가 있어 다음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근간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들보다 우선순위가 앞서기 때문이다.

마귀는 교묘하게 혼합하고 섞어서 우리가 다음에 바로 잡지 못하도록 미혹하는 방법을 잘 쓰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고백에 관한 문제가 그렇다. 당시에 선명하고 정확하게 하지 못하면 추후에 얼버무려 져서 희미해지고 혼합되어 지는 습성이 우리에게 있다.

마귀가 주로 하는 짓이 안면을 밟고 와서 거부하지 못하게 타협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곳에는 꼭 상대방의 선의를 악용해서 나쁜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도들이 선하고 순진한 것을 알고 일부러 교회에서만 전문적으로 사기를 쳐먹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또 공동체의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은 함부로 비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교회에서 자기 마음대로 설쳐서 질서를 교란하는데 그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을 여러 번 본적이 있다.

그렇게 고의적으로 남의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에 적절한 책망이나 징계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핑계로 손을 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기도로 깨어서 분별하지 못한 영적인 게으름에서 나온 나태한 행위일수 있다.

 

 

차라리 전혀 쓴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속편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으면서도, 분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또 있는 것이다.

불의함을 보고도 전혀 권고와 책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혹시 내가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예레미야는 책망(권고)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시켜서 속에서 불이 나는 것을 느끼면서 책망을 했다고 한다.

책망은 내가 쓴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하기 싫은데 하나님이 속에서 하라고 밀어 부칠때 아픔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6).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우리에게 없다.

사랑과 기도가 담긴 권고는 듣는 사람도 영의 감각으로 알아듣게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그 원수가 귀해서가 아니라 내가 귀해서이다. 그 원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처방이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제일 미운 사람을 위해서 가장 먼저, 가장 긴시간 기도하라”.

참 현명한 방법인것 같다. 제일 미운 그 사람을 미워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막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에 그걸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미움이 제거되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나서 권고를 하게 되면 듣는 사람도 그걸 느끼게 되어 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이다.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를 만든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우리에게 없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인간은 그것을 나쁘게 사용할 수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충분히 나쁘게 사용할 수 있는게 인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관점은 ‘어떤 한 사건에 관해서 표면적으로 옳고 그르다는 문제나, 몇 가지 옳아 보이는 행위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봤을때 그 이웃 또는 그 공동체와의 통전적인 사랑의 관계에 관해 선한 의지가 있는가’ 이다..

가끔은 실수도 할 수 있고 또 부주의해서 넘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째로 전체적으로 조망해 봤을때 그가 타인과 공동체를 사랑하는가? 또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선하고자 하는 진실한 의지가 있는가?

이것이 인내가 많으시고 눈과 마음이 넓으신 하나님이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그 전체적인 선한의지나 방향까지 틀어질 수 있다는 급박성이 있을때 조심성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 권고이다.

한 두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고 함부로 내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 나도 분명히 한 두가지 그 사람눈에 거슬리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7).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외적인 절차.(마18:15-17)

성경에 기록한 이 절차도 그 책망을 들어야 하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마음에 상처를 덜 받게 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는가? 여기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가).1대1로 대면해서 만나서 해야 한다.

다른사람에게 험담을 해서도 안되고 그 사람과 1대1로만 해야 한다. 제3자가 모르도록 해야 한다.

나).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사람이 가고

다).그래도 안되면 교회에다가 말해서 처리한다.

그러나 이것도 그를 미워해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보호 차원과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라는 압력으로 죄지은 자에게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4.결어

원칙적으로 권고나 책망은 목회자나 장로뿐 아니라 일반성도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쓴소리 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를 원하신다. 세상과 불의를 향해 책망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필요한 일인지를 안다면 아무나 함부로 나서서 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간 상대를(개인이든 단체이든)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권고(책망) 했다면 설사 그 자세가 단호하고 냉정한 외양을 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한 권고(책망)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대방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판이 아닌 선한 책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여러 번 내 생각을 부인해보고 오래간 기도한 다음에 권면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솔직히 나는 권면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한 적이 많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